‘젠틀맨’과 성추행 그리고 ‘갑을 관계’
‘젠틀맨’과 성추행 그리고 ‘갑을 관계’
by 운영자 2013.05.22
바야흐로 한국인의 문화 역량이 세계적인 이슈로 떠오른 시대에 살고 있음을 실감한다. 가수 싸이의 노래와 청와대 대변인 윤창중의 성추행 사건이 그렇다.
싸이의 노래 젠틀맨은 한 달 사이에 유튜브 조회 수가 3억 뷰를 넘기는 선풍을 일으키고, 1주일 뒤에 빌보드 메인 차트에 5위까지 진입했으나 3주 연속 순위가 떨어져 지난주에는 39위다.
싸이가 미국에서 여러 활동을 펼치고 있어 인기 재상승을 기대한다지만, ‘강남 스타일’ 후광 효과로 얻은 인기로 끝날 것으로 보인다.
□ 비신사적인 젠틀맨
이 노래의 뮤직비디오에는 신사라는 제목과는 다르게 신사답지 못한 가사와 행동이 가득하다. KBS 방송심의에서 주차금지 시설물을 발로 차는 장면이 공공시설물 훼손에 해당되어 방송 부적절이라는 판단을 받았고, 어린이들이 놀이하는 공을 빼앗아 차버리는 것은 약과다.
여성이 앉으려는 의자를 빼내 넘어지게 하고, 달리는 운동기구의 속도를 높여 엎어지게 하며, 방귀 냄새를 모은 손을 코에 들이댄다.
더욱이 여성의 배를 쓰다듬거나 브래지어 끈을 풀어서 놀라게 만들면서 성애 묘사가 이어져, 보기에 불편하다.
한 마디로 젠틀맨은 흥부전에 나오는 놀부의 심술로 채워진 노래다. ‘알랑가 몰라’ 하는 노래 구절로 우리말의 맛깔스러움을 보이지만, 전반적으로 인간을 감동시키는 예술성보다는 천박스럽게 장난치는 내용이다.
이것을 외국인 수 억 명이 찾아봤다는데, 한국인의 문화적 이미지를 실추시키지는 않았을까? 갑의 위치에 있는 남성의 횡포를 보인 것은 아니었을까?
한편, 대통령의 입이라고 하는 윤창중 대변인이 워싱턴에서 저지른 두 차례의 성추행은 권력기관을 탐한 인물의 언행 불일치의 단면을 보여주며, 온 국민을 부끄럽게 했다.
더구나 윤창중은 뻔뻔스럽게도 피해 여성과 국민에게 사과하기는커녕 자기가 떳떳하다고 주장했다.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선거 때는 야당에게 막말로 들이대더니 이번에는 여성에게 성욕을 들이미는 일방주의. 권력기관의 갑을 관계를 동물적으로 보여준 문제다. ‘슈퍼 갑’이나 귀족계급으로 착각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안하무인일 수가 없다.
□ 갑을 관계의 통제력
대통령의 총애를 받으니 조직의 통제도 따르지 않고 성폭행까지 하려던 대변인. 모든 책임은 대통령과 청와대에 있지만 민주적인 통제 원리를 생각하게 한다.
우선, 어느 조직이든 내부 통제가 이뤄져야 한다. 윤창중이 상관인 홍보수석을 무시했을지라도, 문제가 발생한 현장에서 청와대와 대사관의 의사결정 시스템은 통제력을 발휘했어야 했다.
그러나 피해 여성은 조직 통제가 작동되지 않는 한국 정부를 믿지 못하고 미국 경찰에 의지하여 해결을 꾀했다. 갑을 관계의 사슬을 벗어나지 못한 우리 정부가 망신을 불러들인 것이다.
이 사건만이 아니라 남양유업과 대리점, 빵 사장, 라면 상무 등으로 드러난 온갖 횡포들! 천박한 자본주의 갑을 관계로 맺어진 강자의 지배력과 약자의 아픔이 뒤엉킨 문제들이 우리 주변에 널려 있다.
‘라면 상무’라는 걸출한 갑을 배출한 광양제철 공단, 그리고 여수화학 공단이 지역에서 갑으로 군림한 태도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시·군 행정기관 공무원이 고자세를 버리지 못하는 것도 그렇고, 학교에서 학생과 학부모를 대하는 자세에서도 풍겨나는 문제다.
젠틀맨은 이러한 권력자와 가진 자들의 뻔뻔한 이중성을 비꼬는 노래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신사적인 사회 풍토, 철학과 품위가 있는 문화의식을 꿈꾸며. 주권자요 소비자인 국민의 통제를 다시금 생각한다. 진정한 갑은 국민이다. 민주주의의 확장이 끊임없이 이어져야 하는 이유다.
싸이의 노래 젠틀맨은 한 달 사이에 유튜브 조회 수가 3억 뷰를 넘기는 선풍을 일으키고, 1주일 뒤에 빌보드 메인 차트에 5위까지 진입했으나 3주 연속 순위가 떨어져 지난주에는 39위다.
싸이가 미국에서 여러 활동을 펼치고 있어 인기 재상승을 기대한다지만, ‘강남 스타일’ 후광 효과로 얻은 인기로 끝날 것으로 보인다.
□ 비신사적인 젠틀맨
이 노래의 뮤직비디오에는 신사라는 제목과는 다르게 신사답지 못한 가사와 행동이 가득하다. KBS 방송심의에서 주차금지 시설물을 발로 차는 장면이 공공시설물 훼손에 해당되어 방송 부적절이라는 판단을 받았고, 어린이들이 놀이하는 공을 빼앗아 차버리는 것은 약과다.
여성이 앉으려는 의자를 빼내 넘어지게 하고, 달리는 운동기구의 속도를 높여 엎어지게 하며, 방귀 냄새를 모은 손을 코에 들이댄다.
더욱이 여성의 배를 쓰다듬거나 브래지어 끈을 풀어서 놀라게 만들면서 성애 묘사가 이어져, 보기에 불편하다.
한 마디로 젠틀맨은 흥부전에 나오는 놀부의 심술로 채워진 노래다. ‘알랑가 몰라’ 하는 노래 구절로 우리말의 맛깔스러움을 보이지만, 전반적으로 인간을 감동시키는 예술성보다는 천박스럽게 장난치는 내용이다.
이것을 외국인 수 억 명이 찾아봤다는데, 한국인의 문화적 이미지를 실추시키지는 않았을까? 갑의 위치에 있는 남성의 횡포를 보인 것은 아니었을까?
한편, 대통령의 입이라고 하는 윤창중 대변인이 워싱턴에서 저지른 두 차례의 성추행은 권력기관을 탐한 인물의 언행 불일치의 단면을 보여주며, 온 국민을 부끄럽게 했다.
더구나 윤창중은 뻔뻔스럽게도 피해 여성과 국민에게 사과하기는커녕 자기가 떳떳하다고 주장했다.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선거 때는 야당에게 막말로 들이대더니 이번에는 여성에게 성욕을 들이미는 일방주의. 권력기관의 갑을 관계를 동물적으로 보여준 문제다. ‘슈퍼 갑’이나 귀족계급으로 착각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안하무인일 수가 없다.
□ 갑을 관계의 통제력
대통령의 총애를 받으니 조직의 통제도 따르지 않고 성폭행까지 하려던 대변인. 모든 책임은 대통령과 청와대에 있지만 민주적인 통제 원리를 생각하게 한다.
우선, 어느 조직이든 내부 통제가 이뤄져야 한다. 윤창중이 상관인 홍보수석을 무시했을지라도, 문제가 발생한 현장에서 청와대와 대사관의 의사결정 시스템은 통제력을 발휘했어야 했다.
그러나 피해 여성은 조직 통제가 작동되지 않는 한국 정부를 믿지 못하고 미국 경찰에 의지하여 해결을 꾀했다. 갑을 관계의 사슬을 벗어나지 못한 우리 정부가 망신을 불러들인 것이다.
이 사건만이 아니라 남양유업과 대리점, 빵 사장, 라면 상무 등으로 드러난 온갖 횡포들! 천박한 자본주의 갑을 관계로 맺어진 강자의 지배력과 약자의 아픔이 뒤엉킨 문제들이 우리 주변에 널려 있다.
‘라면 상무’라는 걸출한 갑을 배출한 광양제철 공단, 그리고 여수화학 공단이 지역에서 갑으로 군림한 태도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시·군 행정기관 공무원이 고자세를 버리지 못하는 것도 그렇고, 학교에서 학생과 학부모를 대하는 자세에서도 풍겨나는 문제다.
젠틀맨은 이러한 권력자와 가진 자들의 뻔뻔한 이중성을 비꼬는 노래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신사적인 사회 풍토, 철학과 품위가 있는 문화의식을 꿈꾸며. 주권자요 소비자인 국민의 통제를 다시금 생각한다. 진정한 갑은 국민이다. 민주주의의 확장이 끊임없이 이어져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