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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환생

날마다 환생

by 운영자 2013.08.30

언론계를 거쳐 재선의원을 지낸 선배 댁을 방문했다.

노부부만 사는 거실은 기역자 서가를 가득채운 책과, 컴퓨터와 프린터기가 놓인 책상, 일자형 소파가 놓여 더 비좁다.

서재 또한 서가와 책상이 빼곡해 공간이 없다. 국회의원 시절 도서 2535점을 국회도서관에 기증하여 그의 이름을 딴 개인문고가 별도로 설치되어 화제가 된 독서광이다.

눈길을 끈 것은 거실 한 쪽 벽 작은 액자에 미소를 머금은 동자승의 캐리커쳐 아래 ‘340409-150801’의 기호다. “주민등록 앞자리 숫자와 죽음을 예상한 날짜를 조합한 명패(命牌)”라고 한다.

1934년에 태어났으니 우리나이로 여든. 예상대로라면 2년 뒤엔 이승을 하직한다. 액자 밑에 ‘인사 차리다 언제 공부하나.

하루 8시간 이상! 8당 6락이다. 헌법 이야기를 즐겨라. 책과 인터뷰, PC 앞에 기쁘게 몸을 던져라. 팔순을 맞는 네가 다짐한 성스러운 의무다.

1912. 9. 4’이라 쓴 쪽지를 붙여 놓았다. ‘8당 6락’의 일일평가를 탁상용 캘린더에 사인펜으로 표시해놓았다. 8시간 이상 독서와 집필 등 활동을 했으면 동그라미, 6시간 이하면 가위표로 대부분 동그라미다.

잠자리에 들기 전 “오늘도 무사히 지냈다”며 선덕여왕신종을 본뜬 작은 종을 나무망치로 땡땡땡 세 번 친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도 환생 했다”며 땡땡땡 종을 세 번 치며 하루를 시작한다. 명패를 만든 동기가 궁금하다.

“3년 전 폐암 수술을 했어요. 그 뒤 명패를 만들었지요. 과거 없는 오늘이 있을 수 없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오늘이고 지금 이 순간입니다. 과거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도 부끄럽게 생각하지도 않아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자문하며 건강하게 하루를 시작 할 수 있다는 것에 늘 감사하고 기쁘게 생각하며 삽니다.”

그는 현대사의 질곡 한가운데서 특종으로 필명을 날렸다. 국회의원 2선에 공공기관장을 지냈으나 살림살이는 넉넉해 보이지 않는다.

한 때는 “은행 보증을 잘 못서 집을 송두리째 날리고 노모와 처자식 생계가 막막한 적도 있었다”고 털어 놓는다. 궁핍한 시절 글품을 팔며 생계를 꾸리기도 했다.

야당의 대변인 노릇도 했지만 글쓰기는 천직이다. 팔순을 맞은 팔월 우리나라 헌법의 수난사를 다룬 저서를 출간했으니 노(老) 기자의 펜은 녹슬지 않았다.

수술 후 생명의 집착을 버리기 위해 ‘명패’를 만들어 ‘비움의 삶’을 산다. 날마다 새로 태어난다는 각오로 종을 치며 스스로를 일깨운다.

최선을 다해 하루 하루 비움의 공간을 채워 나가는 삶은 아름답다.

<이규섭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