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워하는 모습이 아름답다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아름답다
by 운영자 2013.10.08
<장병호>·전남교육청 장학관
그동안 세간의 주목을 받았던 전직 대통령의 추징금 환수 문제가 자진 납부 계획을 발표하면서 일단락되었다.
16년간이나 돈을 내지 않고 버텨왔는데, 정부가 재산을 압류하면서 강경한 태도를 보이자 끝내 항복을 선언한 것이다.
늦은 감은 있지만 다행이다 싶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얄미운 생각이 든다. 돈을 안 내고 어물쩍 넘어가려다가, 재산 압류로 압박하니까 마지못해 두 손을 들었기 때문이다.
만약 정부가 단호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면 추징금 환수는 어림도 없었으리라고 볼 때, ‘자진 납부’라는 말은 어불성설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내 통장에는 29만 원밖에 없다!”
과거에 이런 발표를 했을 때, 나는 그가 참 뻔뻔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통령 시절 수천 억대의 비자금을 조성한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 아닌가.
그 돈을 어디다 감춰두고 돈이 한 푼도 없다고 큰소리를 친단 말인가.
더욱이 무력으로 정권을 찬탈하고 숱한 젊은이들의 목숨을 앗아간 그가 한 점의 양심이라도 있다면 그리 낯짝이 두꺼울 수가 있을까.
사람은 자기의 부족함이나 잘못에 대해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한다.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곧 양심의 표현이다.
그래서 실수를 하거나 잘못을 저지른 경우에 양심의 거리낌 때문에 고개를 들지 못하게 된다. 사실 부끄러움은 인간의 가장 솔직한 감정 표출이다.
기쁨이나 슬픔이나 분노 같은 희로애락의 감정은 어느 정도 자제할 수가 있지만 부끄러운 감정은 쉽게 조절되지 않는다.
다들 경험해보았듯이 우리가 무슨 실수를 하거나 잘못을 저지르게 되면 당황한 나머지 먼저 얼굴이 뜨거워지고 무의식중에 손이 뒤통수로 올라가게 된다.
범죄 수사에 거짓말 탐지기를 이용하는 것도 이런 신체적 반응 때문일 것이다.
따지고 보면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잘못에 대한 죄의식 때문에 그런 감정이 생겨나는 것이고, 그것은 곧 스스로 잘못을 인정한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텔레비전에 비치는 범죄사건의 피의자들이 한사코 머리에 옷을 덮어쓰고 있는 것도 자기 얼굴을 드러낼 수 없을 만큼 부끄럽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오히려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 문제다. ‘똥 뀐 놈이 성낸다.’는 말처럼 잘못을 저질러 놓고 되레 큰소리를 치는 경우가 없지 않다.
이런 철면피나 만무방이 용인되는 사회는 양심이 마비된 사회가 아닐 수 없다.
그런 세상에서는 어찌 정의가 구현될 수 있겠는가.
중국의 관자(管子)는 나라를 떠받치는 네 개의 밧줄[四維]로 예의염치(禮義廉恥)를 든 바 있다. 그리고 이것들이 끊어지면 나라가 위태롭다고 말했는데, 그 네 밧줄 중의 하나가 바로 부끄러움[恥]이다.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을 개인의 도리만이 아니라 국가 경영의 차원으로까지 중요하게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을 보면 양심적인 인물이 나온다. 가석방 출감 후 잠적한 주인공은 시장으로 변신하는데, 어느 무고한 사람이 자기 대신 붙잡혀 벌을 받게 되는 것을 알고 고민한다.
자기 정체가 밝혀지면 그동안 쌓은 지위와 명예를 한꺼번에 잃게 될 형편이다. 그렇지만 그는 재판정에 나아가 사실을 밝힌다.
“내가 장발장이오. 저 사람은 죄가 없으니 풀어주시오!”
일신의 안락을 생각하면 입 다물고 모른 척할 수도 있지만 차마 죄 없는 사람이 누명을 쓰는 것을 두고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남을 속일 수는 있어도 자신을 속일 수가 없는 것, 이것이 바로 양심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양심적인 사람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 괴롭기 때문에 견디지 못하고 자백을 하거나 때로는 목숨을 내놓기도 한다.
부끄러움은 인간만이 가진 감정이다.
인간 말고는 부끄럽다고 얼굴이 달아오르는 동물이 없다. 어쩌면 부끄러움이야말로 인간과 금수를 구별해 주는 척도가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은 금수나 마찬가지라는 논리가 성립된다.
제발 앞으로는 우리나라에 추징금 따위로 지탄 받는 뻔뻔스런 대통령이 다시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동안 세간의 주목을 받았던 전직 대통령의 추징금 환수 문제가 자진 납부 계획을 발표하면서 일단락되었다.
16년간이나 돈을 내지 않고 버텨왔는데, 정부가 재산을 압류하면서 강경한 태도를 보이자 끝내 항복을 선언한 것이다.
늦은 감은 있지만 다행이다 싶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얄미운 생각이 든다. 돈을 안 내고 어물쩍 넘어가려다가, 재산 압류로 압박하니까 마지못해 두 손을 들었기 때문이다.
만약 정부가 단호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면 추징금 환수는 어림도 없었으리라고 볼 때, ‘자진 납부’라는 말은 어불성설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내 통장에는 29만 원밖에 없다!”
과거에 이런 발표를 했을 때, 나는 그가 참 뻔뻔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통령 시절 수천 억대의 비자금을 조성한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 아닌가.
그 돈을 어디다 감춰두고 돈이 한 푼도 없다고 큰소리를 친단 말인가.
더욱이 무력으로 정권을 찬탈하고 숱한 젊은이들의 목숨을 앗아간 그가 한 점의 양심이라도 있다면 그리 낯짝이 두꺼울 수가 있을까.
사람은 자기의 부족함이나 잘못에 대해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한다.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곧 양심의 표현이다.
그래서 실수를 하거나 잘못을 저지른 경우에 양심의 거리낌 때문에 고개를 들지 못하게 된다. 사실 부끄러움은 인간의 가장 솔직한 감정 표출이다.
기쁨이나 슬픔이나 분노 같은 희로애락의 감정은 어느 정도 자제할 수가 있지만 부끄러운 감정은 쉽게 조절되지 않는다.
다들 경험해보았듯이 우리가 무슨 실수를 하거나 잘못을 저지르게 되면 당황한 나머지 먼저 얼굴이 뜨거워지고 무의식중에 손이 뒤통수로 올라가게 된다.
범죄 수사에 거짓말 탐지기를 이용하는 것도 이런 신체적 반응 때문일 것이다.
따지고 보면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잘못에 대한 죄의식 때문에 그런 감정이 생겨나는 것이고, 그것은 곧 스스로 잘못을 인정한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텔레비전에 비치는 범죄사건의 피의자들이 한사코 머리에 옷을 덮어쓰고 있는 것도 자기 얼굴을 드러낼 수 없을 만큼 부끄럽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오히려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 문제다. ‘똥 뀐 놈이 성낸다.’는 말처럼 잘못을 저질러 놓고 되레 큰소리를 치는 경우가 없지 않다.
이런 철면피나 만무방이 용인되는 사회는 양심이 마비된 사회가 아닐 수 없다.
그런 세상에서는 어찌 정의가 구현될 수 있겠는가.
중국의 관자(管子)는 나라를 떠받치는 네 개의 밧줄[四維]로 예의염치(禮義廉恥)를 든 바 있다. 그리고 이것들이 끊어지면 나라가 위태롭다고 말했는데, 그 네 밧줄 중의 하나가 바로 부끄러움[恥]이다.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을 개인의 도리만이 아니라 국가 경영의 차원으로까지 중요하게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을 보면 양심적인 인물이 나온다. 가석방 출감 후 잠적한 주인공은 시장으로 변신하는데, 어느 무고한 사람이 자기 대신 붙잡혀 벌을 받게 되는 것을 알고 고민한다.
자기 정체가 밝혀지면 그동안 쌓은 지위와 명예를 한꺼번에 잃게 될 형편이다. 그렇지만 그는 재판정에 나아가 사실을 밝힌다.
“내가 장발장이오. 저 사람은 죄가 없으니 풀어주시오!”
일신의 안락을 생각하면 입 다물고 모른 척할 수도 있지만 차마 죄 없는 사람이 누명을 쓰는 것을 두고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남을 속일 수는 있어도 자신을 속일 수가 없는 것, 이것이 바로 양심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양심적인 사람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 괴롭기 때문에 견디지 못하고 자백을 하거나 때로는 목숨을 내놓기도 한다.
부끄러움은 인간만이 가진 감정이다.
인간 말고는 부끄럽다고 얼굴이 달아오르는 동물이 없다. 어쩌면 부끄러움이야말로 인간과 금수를 구별해 주는 척도가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은 금수나 마찬가지라는 논리가 성립된다.
제발 앞으로는 우리나라에 추징금 따위로 지탄 받는 뻔뻔스런 대통령이 다시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