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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이 사라진 가을

사색이 사라진 가을

by 운영자 2013.10.18

잠자는 생각을 깨우기 좋은 계절이다. 쪽빛 하늘을 이고 하늘거리는 코스모스를 바라보며 깃털처럼 가벼운 생각들을 하늘에 날려 보낸다.

파도처럼 넘실거리는 황금빛 들녘에서 소중한 금빛 생각들을 가슴에 여민다.

물이랑으로 일렁이는 가을 햇살에 흐트러진 마음을 헹구면 생각은 절로 명징해진다. 언제부터인가 가을은 독서의 계절, 사색의 계절이라던 말조차 사라졌다.

귀뚜라미의 구성진 노래 속에 깊어가는 가을밤, 왜 사색(思索)이 사라지는지를 생각해 본다. 한국인의 독서량은 OECD 기준으로 꼴찌다.

책을 읽지 않으니 생각의 영양실조에 걸리기 마련이다. 생각이 없으니 사려 깊지 못하고 독단에 빠지기 쉽다. 통찰력과 판단력은 무뎌지고, 이성과 지성이 제대로 작동할리 없다.

생각이 얄팍해지니 염치도 없다. 뻔한 거짓말과 궤변으로 진실을 호도하거나 위기를 모면하려는 뻔뻔함이 판치는 세상이 됐다.

디지털의 진화는 생각의 퇴화를 초래했다. 젊은이들은 속도의 환상에 빠져 멀티태스킹에 몰두한다.

컴퓨터로 두 가지 일을 하는 것은 예사고 MP3로 음악을 듣는 것은 덤이다.

인간의 두뇌는 한 가지 일에 집중할 때 더 높은 성과를 내지만 일의 효율성은 떨어진다. 대화를 하면서도 시선은 스마트폰에 꽂혀있어 정서불안현상마저 나타난다.

예전엔 노래 몇 곡 정도는 가사를 외웠지만 노래방 기기가 나오면서 거의 까먹었다. 휴대폰에 전화번호를 입력하고 단축키를 활용하면서 집 전화번호마저 기억나지 않을 때가 많다.

특히 사람들의 이름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대화를 이어가다보면 뒤 늦게 생각나기 일쑤다. 디지털 기기에 의존하면서 건망증이 심해지는 이른바 ‘디지털 치매’현상이다.

온라인 설문 조사 결과 10명 중 4명꼴이라니 여간 심각한 게 아니다.

우습게 여겼다간 진짜 치매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다니 초기대응이 절실하다.

스마트폰 의존도가 높을수록 소통은 실종된다. 대화가 줄면 생각도 짧아지기 마련. 상대방의 주장에 귀 기울이지 않고 자신의 주장만 강조한다.

TV토론도 논쟁의 접점을 찾아 대안을 제시하기보다 오만과 독선에 빠져 갈등의 골만 깊게 만든다. 강의 중 아이들의 질문을 받을 때 확실하지 않으면 모른다고 대답하고 곧바로 검색에 들어간다.

정보가 필요할 때 두뇌에 저장 된 정보를 끄집어내려는 노력 없이 무조건 확인하는 버릇은 생각하는 뇌기능을 퇴화시킨다.

인간의 뇌는 많이 쓸수록 좋아진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디지털 치매’를 예방하려면 디지털 기기와 스마트폰 의존도를 줄이고 뇌에 지적 자극을 주라고 권장한다.

서정주 시인은 말년에 세계의 도시와 산 이름을 외우며 가물거리는 기억력을 유지했다. 메모와 일기쓰기, 신문정독, 간단한 계산은 머리로 하는 것도 방법이다.

사색은 인생을 논하고 철학적 사유를 하는 것만이 아니다. 표피적 현상에 생각 없이 즉각 반응하고 집단 심리에 쉽게 매몰 되는 것은 생각이 짧기 때문이다. 깊어가는 가을, 단풍처럼 마음을 곱게 물들이며 생각을 생각하자. 생각이 깊어지면 사색이 된다.

<이규섭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