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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 ‘순이’

인형 ‘순이’

by 운영자 2013.11.12

처음 보는 낯선 인형과 눈물 맞추며 진지하게 말을 해보기는 처음이었습니다.

이름은 ‘순이’. 30센티미터 안쪽의 키에 통통한 몸매, 큰 눈과 오뚝한 코와는 거리가 먼 작은 눈에 거의 보이지 않는 코, 웃음을 머금은 듯한 가는 입술이 이름처럼 순해 보입니다.

‘순이’는 이야기를 잘 들어주니까 부담 갖지 말고 한 사람씩 돌아가며 인사를 나누거나 아무 이야기나 하고 싶은 말을 해보라는 강사의 설명을 듣긴 했지만, 막상 인형을 손에 들고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막막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고 놀라울 정도로 말이 술술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안녕, 만나서 반가워. 나는 오늘 사무실에서 하루 종일 회의를 했는데, 모두들 다른 사람 말을 듣기 보다는 자기 말만 하느라고 엄청 정신이 없었어. 정말 힘들고 기운 빠진 하루였는데 이런 내 기분을 너한테 이야기하니까 좋다. (여, 41세)”

“처음 만난 너한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오랜만에 모임에 왔는데 좋은 시간 만들도록 노력할게. (남, 49세)”

“순이야, 나는 요즘 마음이 참 힘들어. 남편은 물론이고 다른 가족들과도 뭔가 잘 안 통하고 불편한 게 많아. 그래서 화도 나고 힘들어. 처음 만나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좀 부끄럽기는 하지만 많이 속상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란다. (여, 62세)”

“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그동안 바쁜 일이 있어서 2년 반 만에 이 자리에 왔는데 잊지 않고 기억해 주는 분이 있어서 행복하고, 나처럼 얼마 전 직장을 그만두고 백수로 지내는 사람이 옆에 앉아있어서 마음이 놓인다. 하하. 그나저나 요즘 내 마음을 무겁게 하는 일이 하나 있는데 앞으로 잘 풀어나가야겠지. 아무튼 만나서 반갑다. (남, 53세)”

‘내 몸 열기, 마음열기’라는 제목으로 종교와는 무관한 명상체험을 해보는 자리였는데 시작하면서 곧바로 자기소개를 겸해서 인형과 마음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어린아이도 아니고 다 큰 어른들이 인형을 보며 이야기를 한다는 게 얼핏 생각하면 우스울 것 같지만 약속이나 한 듯 모두가 진지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하루의 일과, 요즘 겪고 있는 마음의 어려움들, 지금 이 자리에서 느끼는 감정들을 드러내 이야기하고 누군가와 나누고 싶은 소망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인형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잠시 마음자리를 내주고 귀를 기울여준다면 더 좋을 것 같긴 하지만, 섣불리 자기 의견을 내세우지 않고 아무런 대답도 표정의 변화도 없이 가만히 듣기만 하는 인형이 오히려 더 많은 위로가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유경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