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애와 망각
겸애와 망각
by 운영자 2014.05.19
<강판권목사>
- 성지감리 교회 담임목사
- 흙과 농부와 목자가 만나면의 저자
겸애는 함께 사랑하는 것이고, 망각은 잊는 것이다. 평소에는 보편적 사랑을 실천할 일이 거의 없다. 평소에는 가족끼리, 연인끼리만 사랑을 나누어도 상관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큰 일이 벌어지면 가족끼리, 연인끼리만 나누는 사랑은 독점으로 비칠 가능성이 아주 높다.
중국의 전국시대에 묵자는 겸애를 주장했지만, 맹자는 묵자의 겸애를 비판했다. 묵자가 겸애를 주장한 것은 유가의 가족 간의 사랑이 배타적이고, 그런 배타적인 사랑이 혼란한 전국시대를 낳은 주요한 원인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반면 맹자는 묵자의 그러한 주장이 짐승 같은 존재만 할 수 있는 일이고, 인간으로서는 그런 사랑이 불가능하다고 반박했다.
묵자는 전국시대라는 혼란의 시대에는 가족 간의 사랑으로는 혼란을 종식시킬 수 없다고 생각한 반면, 맹자는 인간 본성의 문제만으로 묵자의 주장을 반박했다.
내가 ‘세월호 사건’을 마주하면서 묵자의 겸애를 떠올리는 것은 지금 겸애가 무척 절실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국민들의 애도는 바로 겸애와 같은 것이다.
인간은 오로지 자기 자식만을 사랑하는 존재는 아니다. 남의 자식도 자신의 자식처럼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사람이다.
만약 맹자의 주장대로 남의 자식을 자신의 자식처럼 생각할 수 없다면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입양’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전국시대 묵자의 주장은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었다.
경쟁이 치열했던 전국시대 묵자의 주장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현재 우리나라 국민들은 오로지 자기 자식만을 생각하는 풍토에 익숙하다. 이런 풍토는 인간이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지만, 결국 인간의 자멸을 초래할 수 있다.
공자는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남을 먼저 일으켜 세우는 것을 인이라 주장했다. 그래서 ‘살신성인(殺身成仁)’이라 부른다.
우리는 세월호 사건을 통해 살신성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세월호 사건은 우리에게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길인지를 묻고 있기 때문이다.
망각은 죽음의 징조이다. 무엇을 잊는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기억해야할 것은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국민들은 망각에 아주 익숙하다. 엄청난 사건이 이전에도 발생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금방 잊어버린다. 그래서 비슷한 일이 반복해서 발생한다.
많은 사람들이 앞으로의 한국사회를 세월호 사건의 전후로 평가하는데 주저하지 않지만, 망각에 익숙한 국민들의 습성이 바뀌지 않는 한, 세월호 사건은 또 다시 다른 사건처럼 우리들의 기억에서 사라질 것이다.
어떤 상처든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굳이 기억에서 지우려고 노력해서도 안 된다. 수 천 년을 사는 나무든, 1년을 산 나무든 몸속에 상처를 안고 있다.
몸속의 상처는 엄청난 아픔이지만 그것은 생명체를 성숙하게 만든다. 그러니 세월호 사건에서 겪은 상처는 당사자는 물론 국민 모두 안고 갈 수 밖에 없다.
문제는 그 상처를 성숙의 거름으로 삼을 수 있느냐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상처를 성숙의 거름으로 삼을 수 있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상처를 도려내려고 노력할 것이다. 겸애는 다른 사람을 기억하는 행동이고, 망각은 다른 사람을 잊는 행동이다.
지금 한국은 겸애와 망각의 갈림길에 서있다. 겸애 정신을 발휘하면 어떤 아픔도 극복할 수 있지만 망각의 습성을 버리지 못하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다.
- 성지감리 교회 담임목사
- 흙과 농부와 목자가 만나면의 저자
겸애는 함께 사랑하는 것이고, 망각은 잊는 것이다. 평소에는 보편적 사랑을 실천할 일이 거의 없다. 평소에는 가족끼리, 연인끼리만 사랑을 나누어도 상관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큰 일이 벌어지면 가족끼리, 연인끼리만 나누는 사랑은 독점으로 비칠 가능성이 아주 높다.
중국의 전국시대에 묵자는 겸애를 주장했지만, 맹자는 묵자의 겸애를 비판했다. 묵자가 겸애를 주장한 것은 유가의 가족 간의 사랑이 배타적이고, 그런 배타적인 사랑이 혼란한 전국시대를 낳은 주요한 원인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반면 맹자는 묵자의 그러한 주장이 짐승 같은 존재만 할 수 있는 일이고, 인간으로서는 그런 사랑이 불가능하다고 반박했다.
묵자는 전국시대라는 혼란의 시대에는 가족 간의 사랑으로는 혼란을 종식시킬 수 없다고 생각한 반면, 맹자는 인간 본성의 문제만으로 묵자의 주장을 반박했다.
내가 ‘세월호 사건’을 마주하면서 묵자의 겸애를 떠올리는 것은 지금 겸애가 무척 절실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국민들의 애도는 바로 겸애와 같은 것이다.
인간은 오로지 자기 자식만을 사랑하는 존재는 아니다. 남의 자식도 자신의 자식처럼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사람이다.
만약 맹자의 주장대로 남의 자식을 자신의 자식처럼 생각할 수 없다면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입양’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전국시대 묵자의 주장은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었다.
경쟁이 치열했던 전국시대 묵자의 주장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현재 우리나라 국민들은 오로지 자기 자식만을 생각하는 풍토에 익숙하다. 이런 풍토는 인간이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지만, 결국 인간의 자멸을 초래할 수 있다.
공자는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남을 먼저 일으켜 세우는 것을 인이라 주장했다. 그래서 ‘살신성인(殺身成仁)’이라 부른다.
우리는 세월호 사건을 통해 살신성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세월호 사건은 우리에게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길인지를 묻고 있기 때문이다.
망각은 죽음의 징조이다. 무엇을 잊는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기억해야할 것은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국민들은 망각에 아주 익숙하다. 엄청난 사건이 이전에도 발생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금방 잊어버린다. 그래서 비슷한 일이 반복해서 발생한다.
많은 사람들이 앞으로의 한국사회를 세월호 사건의 전후로 평가하는데 주저하지 않지만, 망각에 익숙한 국민들의 습성이 바뀌지 않는 한, 세월호 사건은 또 다시 다른 사건처럼 우리들의 기억에서 사라질 것이다.
어떤 상처든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굳이 기억에서 지우려고 노력해서도 안 된다. 수 천 년을 사는 나무든, 1년을 산 나무든 몸속에 상처를 안고 있다.
몸속의 상처는 엄청난 아픔이지만 그것은 생명체를 성숙하게 만든다. 그러니 세월호 사건에서 겪은 상처는 당사자는 물론 국민 모두 안고 갈 수 밖에 없다.
문제는 그 상처를 성숙의 거름으로 삼을 수 있느냐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상처를 성숙의 거름으로 삼을 수 있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상처를 도려내려고 노력할 것이다. 겸애는 다른 사람을 기억하는 행동이고, 망각은 다른 사람을 잊는 행동이다.
지금 한국은 겸애와 망각의 갈림길에 서있다. 겸애 정신을 발휘하면 어떤 아픔도 극복할 수 있지만 망각의 습성을 버리지 못하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