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속상한 시간
참 속상한 시간
by 운영자 2014.07.02
살다보면 비로소 깨닫게 되는 말들이 있습니다.몰랐던 말은 아니지만 그 말의 의미를 뒤늦게 깨닫게 되는 것들이 있지요.
삶이 우리를 가르치는 방법 중에는 분명 ‘뒤늦은 깨달음’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뒤늦게 후회하면서 깨닫는 것들이 적지 않습니다.
“오, 맙소사. 죽는 순간에 이르러서야 이제까지 한 번도 제대로 살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다니!” 했던 소로우의 탄식은 결코 과장이나 허사가 아닌 것이지요.
‘어머니는 살아서는 서푼이요, 죽어서는 만 냥'이라는 말도 그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서푼에 비길 만큼 초라해 보였던 것은 가없는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구멍 뚫린 양말도 얼마든지 신고, 허름한 옷도 괜찮고, 찬밥은 달게 드시고 쉰밥은 씻어 드시고, 불편함을 오히려 편하게 여기셨던 사랑을 철없는 자식들은 서푼의 초라함으로 바라보곤 합니다.
그 사랑이 서푼이 아니라는 것을, 만 냥에도 비길 수 없을 만큼 크시다는 것을 자식들은 뒤늦게야 깨닫게 됩니다. 깨달을 때쯤이면 부모님은 이미 이 땅을 떠나셨고, 그리고 나면 하늘같은 은혜는 갚을 길이 없게 되고 맙니다.
‘세 닢 주고 집 사고 천 냥 주고 이웃 산다’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세 닢과 천 냥은 비교가 안 됩니다. 실제로도 그렇고 어감으로도 큰 차이가 느껴집니다. 세 닢은 마른 지푸라기처럼 가볍게 여겨지고, 천 냥은 묵중한 가치로 다가옵니다.
그런데 우리의 속담은 ‘세 닢 주고 집 사고 천 냥 주고 이웃 산다’ 합니다. 그래야 하는 거라고, 그게 맞는 거라는 뜻이겠지요. 감히 집과 이웃을 가치로 비교할 수는 없지만, 굳이 비교한다면 집보다도 이웃을 더 소중히 여기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보면 오늘날에는 거꾸로 입니다. 완전히 정반대가 되었습니다. 천 냥 주고 집을 사면서도, 이웃의 가치는 세 닢보다도 가볍게 여깁니다.
아무리 천 냥짜리 집을 가지고 있으면 무얼 하겠습니까, 서로가 서로를 세 닢으로 여기면 결국 우리는 모두 세 닢짜리 삶이 되고 마는 것을요.
알고 있던 말이었지만 최근에 그 의미를 새롭게 새기게 된 말이 있습니다. <논어>에 ‘불환무위 환소이립’(不患無位 患所以立)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자리 없음을 걱정하지 말고, 그 자리에 설 수 있는지를 걱정하라’는 뜻입니다. 자리를 함부로 탐할 것이 아니라 나를 돌아보는 일이 우선임을 분명하게 이르고 있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중요하다면 더없이 중요한 자리, 불쑥 그 자리에 나섰다가 그동안 감추어져 있던 지난날의 잘못들이 낱낱이 드러나 부끄러움으로 물러서는 모습을 보는 것은 여간 씁쓸한 일이 아닙니다.
지난날의 잘못과 허물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내가 잘 알 터, 아무리 좋은 자리라 하여도 그 자리에 설 자격이 없다 싶을 땐 나서지 않는 것이 그나마 염치 있는 모습이지요.
속상함으로 옛 가르침 하나를 마음에 새기는 요즘은 참 속상한 시간입니다.
삶이 우리를 가르치는 방법 중에는 분명 ‘뒤늦은 깨달음’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뒤늦게 후회하면서 깨닫는 것들이 적지 않습니다.
“오, 맙소사. 죽는 순간에 이르러서야 이제까지 한 번도 제대로 살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다니!” 했던 소로우의 탄식은 결코 과장이나 허사가 아닌 것이지요.
‘어머니는 살아서는 서푼이요, 죽어서는 만 냥'이라는 말도 그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서푼에 비길 만큼 초라해 보였던 것은 가없는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구멍 뚫린 양말도 얼마든지 신고, 허름한 옷도 괜찮고, 찬밥은 달게 드시고 쉰밥은 씻어 드시고, 불편함을 오히려 편하게 여기셨던 사랑을 철없는 자식들은 서푼의 초라함으로 바라보곤 합니다.
그 사랑이 서푼이 아니라는 것을, 만 냥에도 비길 수 없을 만큼 크시다는 것을 자식들은 뒤늦게야 깨닫게 됩니다. 깨달을 때쯤이면 부모님은 이미 이 땅을 떠나셨고, 그리고 나면 하늘같은 은혜는 갚을 길이 없게 되고 맙니다.
‘세 닢 주고 집 사고 천 냥 주고 이웃 산다’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세 닢과 천 냥은 비교가 안 됩니다. 실제로도 그렇고 어감으로도 큰 차이가 느껴집니다. 세 닢은 마른 지푸라기처럼 가볍게 여겨지고, 천 냥은 묵중한 가치로 다가옵니다.
그런데 우리의 속담은 ‘세 닢 주고 집 사고 천 냥 주고 이웃 산다’ 합니다. 그래야 하는 거라고, 그게 맞는 거라는 뜻이겠지요. 감히 집과 이웃을 가치로 비교할 수는 없지만, 굳이 비교한다면 집보다도 이웃을 더 소중히 여기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보면 오늘날에는 거꾸로 입니다. 완전히 정반대가 되었습니다. 천 냥 주고 집을 사면서도, 이웃의 가치는 세 닢보다도 가볍게 여깁니다.
아무리 천 냥짜리 집을 가지고 있으면 무얼 하겠습니까, 서로가 서로를 세 닢으로 여기면 결국 우리는 모두 세 닢짜리 삶이 되고 마는 것을요.
알고 있던 말이었지만 최근에 그 의미를 새롭게 새기게 된 말이 있습니다. <논어>에 ‘불환무위 환소이립’(不患無位 患所以立)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자리 없음을 걱정하지 말고, 그 자리에 설 수 있는지를 걱정하라’는 뜻입니다. 자리를 함부로 탐할 것이 아니라 나를 돌아보는 일이 우선임을 분명하게 이르고 있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중요하다면 더없이 중요한 자리, 불쑥 그 자리에 나섰다가 그동안 감추어져 있던 지난날의 잘못들이 낱낱이 드러나 부끄러움으로 물러서는 모습을 보는 것은 여간 씁쓸한 일이 아닙니다.
지난날의 잘못과 허물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내가 잘 알 터, 아무리 좋은 자리라 하여도 그 자리에 설 자격이 없다 싶을 땐 나서지 않는 것이 그나마 염치 있는 모습이지요.
속상함으로 옛 가르침 하나를 마음에 새기는 요즘은 참 속상한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