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까중의 추억
까까중의 추억
by 운영자 2014.07.09
요즘 초중고 학생들은 머리를 자유롭게 기르고 다닌다. 예전 나의 학창시절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1960년대 초등학교 시절의 빛바랜 사진을 보면 내 머리 모양이 까까중이다. 그 시절 우리 같은 촌놈들은 머리를‘활딱’깎은 빡빡머리가 대부분이었다.
머리를 모양내어 깎으려면 이발소에 가야 하는데, 면소재지까지 거리도 멀 뿐더러 무엇보다 이발비가 아까웠다. 그래서 이발기구가 있는 동네 아저씨네 집에 갔다.
아저씨가 들에 일을 나갔나, 안 나갔나 봐서 집에 있을 때 찾아가면 머리를 깎을 수 있었다. 그 때의 이발기구가 ‘바리깡’이었다.
바리깡을 대면 불밤송이 같은 머리가 금방 까까중으로 바뀌었다. 당시는 형편이 어렵던 시절이라 머리 모양을 내는 것 따위는 관심이 없었다.
이발하러 가는 번거로움을 줄이려면 머리를 최대한 짧게 깎을 필요가 있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바리깡으로 머리를 깡그리 미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아저씨네 집에 가서 마루 아래 댓돌에 걸터앉으면 먼저 목에 책보자기가 둘러진다. 그리고 바리깡이 앞이마에서 정수리를 향해 고속도로를 내기 시작한다.
다음으로는 양쪽 귀밑머리에서 위로 올라가며 옆머리를 밀어 중국인의 변발 비슷한 모양을 만든다.
이어서 뒷목에 바리깡을 대고 서너 차례 올려붙이면 이발이 마무리되는데, 그 때는 뒤통수의 크고 작은 흉터자국으로 인해 개구쟁이의 이력이 고스란히 드러나게 마련이었다.
그런데 바리깡에 머리를 맡기는 일이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그게 동네에 하나밖에 없는 귀한 물건인지라 하도 여러 사람이 오래 쓰다 보니까 말을 제대로 듣지 않았다.
겹쳐진 금속의 날이 용수철 손잡이의 움직임에 따라 서로 비꼈다 맞물리며 머리칼이 잘리는데, 워낙 날이 무뎌진 탓에 머리칼이 두 날 사이에 물려서 빠지지 않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정사정없는 아저씨는 이까짓 게 무슨 대수냐 하고 막무가내로 밀어붙여 버리니 기계에 물린 머리칼은 어쩔 수 없이 뽑힐 수밖에 없었다.
그럴 때마다 내 입에서는 “아야! 아야!” 하고 비명이 터져 나왔는데, “인마! 사내자식이 이것도 못 참아?” 하며 되레 호통을 치기 때문에 마음대로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다. 가까스로 머리를 다 밀고 나면 내 눈에는 눈물이 흥건히 고여 있곤 했다.
그래도 아저씨가 목에 둘렀던 보자기를 풀어 머리칼을 털어내고, 다시 그것으로 내 목덜미를 툭툭 털어주며, “됐다!”하고 작업 종료를 선언할 때의 해방감이란! 스쳐가는 바람결이 간지러울 만큼 두상이 시원해지는 그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을 무엇에 비기랴!
중학생 때도 까까중 신세는 마찬가지였다. 중학교에서는 특히 머리 단속이 심했다.
호랑이 같은 규율부가 교문 앞에 버티고 서서 머리 상태를 호시탐탐 살피는데, 어쩌다 머리가 걸렸다 하면 아침부터 따귀를 얻어맞아가지고 뺨이 빨갛게 붓거나, 아니면 운동장을 몇 바퀴 돈 뒤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교실에 들어가야 했다.
그런 와중에도 몇몇 멋쟁이 친구들은 앞머리를 살짝 덜 깎은 스포츠머리로 규율부의 눈을 용케 피하고는 쉬는 시간이면 손거울을 보며 희희낙락거리곤 했다.
그 무렵 내가 이발하러 다닌 곳은 이용학원이었다. 거기에 가면 이용기술을 배우는 젊은 학원생들이 실습을 겸해서 머리를 깎아주는데, 이발비가 시중보다 싼 게 매력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실습대상이 되어주었으니 오히려 돈을 받았어야 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그때는 싸게 해주는 것만도 감지덕지해서 상당 기간 단골이 되었다.
그런데 이발비가 싼 만큼 그 대가는 각오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학원생들의 솜씨가 서툴러서였는지, 아니면 바리깡의 성능이 좋지 않아서였는지는 몰라도 머리가 뽑히는 고통은 초등학교 시절보다 더했다.
그야말로 머리를 깎는 정도가 아니라 숫제 쥐어뜯다시피 하는지라 이발을 할 때마다 대단한 인내심이 요구되었다. 그래도 중학생 체면에 초등학생 시절처럼 “아야! 아야!” 소리를 지를 수 없어서 이를 악물고 비명을 삼켰는데, 웬만한 고통은 내색을 하지 않는 나의 습성은 이미 그 때 길러진 것인지도 모른다.
바리깡은 프랑스에서 처음 만들어져서 일본을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왔다고 한다. 그리고 바리깡이란 이름도 원래는 회사명이었던 것이 일본으로 수입되면서 제품명으로 둔갑했고, 우리나라에 건너와서도 그대로 통용된 것이라고 한다. 국어순화 차원에서 ‘이발기’로 고쳐 부르자는 주장이 있지만 한번 굳어져버린 말이라 쉽사리 바뀌지 않고 있다.
요즘도 이용원에 가면 이 이발기가 있다. 그러나 옛날처럼 손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전기에 꽂아 쓰는 자동식이라 손잡이가 있던 옛 모양과는 많이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성능도 아주 좋아져서 예전처럼 고객의 미간을 찌푸리게 하는 일이 없어졌다.
요즘 같이 고객이 왕인 세상에 옛날처럼 머리칼을 쥐어뜯었다가는 당장 가게 문을 닫아야 하지 않을까.
까까중 모습이라고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요즘 청소년들의 자유로운 머리모습을 보며, ‘세상 참 좋아졌구나!’ 하는 느낌을 받는다.
머리를 모양내어 깎으려면 이발소에 가야 하는데, 면소재지까지 거리도 멀 뿐더러 무엇보다 이발비가 아까웠다. 그래서 이발기구가 있는 동네 아저씨네 집에 갔다.
아저씨가 들에 일을 나갔나, 안 나갔나 봐서 집에 있을 때 찾아가면 머리를 깎을 수 있었다. 그 때의 이발기구가 ‘바리깡’이었다.
바리깡을 대면 불밤송이 같은 머리가 금방 까까중으로 바뀌었다. 당시는 형편이 어렵던 시절이라 머리 모양을 내는 것 따위는 관심이 없었다.
이발하러 가는 번거로움을 줄이려면 머리를 최대한 짧게 깎을 필요가 있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바리깡으로 머리를 깡그리 미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아저씨네 집에 가서 마루 아래 댓돌에 걸터앉으면 먼저 목에 책보자기가 둘러진다. 그리고 바리깡이 앞이마에서 정수리를 향해 고속도로를 내기 시작한다.
다음으로는 양쪽 귀밑머리에서 위로 올라가며 옆머리를 밀어 중국인의 변발 비슷한 모양을 만든다.
이어서 뒷목에 바리깡을 대고 서너 차례 올려붙이면 이발이 마무리되는데, 그 때는 뒤통수의 크고 작은 흉터자국으로 인해 개구쟁이의 이력이 고스란히 드러나게 마련이었다.
그런데 바리깡에 머리를 맡기는 일이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그게 동네에 하나밖에 없는 귀한 물건인지라 하도 여러 사람이 오래 쓰다 보니까 말을 제대로 듣지 않았다.
겹쳐진 금속의 날이 용수철 손잡이의 움직임에 따라 서로 비꼈다 맞물리며 머리칼이 잘리는데, 워낙 날이 무뎌진 탓에 머리칼이 두 날 사이에 물려서 빠지지 않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정사정없는 아저씨는 이까짓 게 무슨 대수냐 하고 막무가내로 밀어붙여 버리니 기계에 물린 머리칼은 어쩔 수 없이 뽑힐 수밖에 없었다.
그럴 때마다 내 입에서는 “아야! 아야!” 하고 비명이 터져 나왔는데, “인마! 사내자식이 이것도 못 참아?” 하며 되레 호통을 치기 때문에 마음대로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다. 가까스로 머리를 다 밀고 나면 내 눈에는 눈물이 흥건히 고여 있곤 했다.
그래도 아저씨가 목에 둘렀던 보자기를 풀어 머리칼을 털어내고, 다시 그것으로 내 목덜미를 툭툭 털어주며, “됐다!”하고 작업 종료를 선언할 때의 해방감이란! 스쳐가는 바람결이 간지러울 만큼 두상이 시원해지는 그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을 무엇에 비기랴!
중학생 때도 까까중 신세는 마찬가지였다. 중학교에서는 특히 머리 단속이 심했다.
호랑이 같은 규율부가 교문 앞에 버티고 서서 머리 상태를 호시탐탐 살피는데, 어쩌다 머리가 걸렸다 하면 아침부터 따귀를 얻어맞아가지고 뺨이 빨갛게 붓거나, 아니면 운동장을 몇 바퀴 돈 뒤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교실에 들어가야 했다.
그런 와중에도 몇몇 멋쟁이 친구들은 앞머리를 살짝 덜 깎은 스포츠머리로 규율부의 눈을 용케 피하고는 쉬는 시간이면 손거울을 보며 희희낙락거리곤 했다.
그 무렵 내가 이발하러 다닌 곳은 이용학원이었다. 거기에 가면 이용기술을 배우는 젊은 학원생들이 실습을 겸해서 머리를 깎아주는데, 이발비가 시중보다 싼 게 매력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실습대상이 되어주었으니 오히려 돈을 받았어야 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그때는 싸게 해주는 것만도 감지덕지해서 상당 기간 단골이 되었다.
그런데 이발비가 싼 만큼 그 대가는 각오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학원생들의 솜씨가 서툴러서였는지, 아니면 바리깡의 성능이 좋지 않아서였는지는 몰라도 머리가 뽑히는 고통은 초등학교 시절보다 더했다.
그야말로 머리를 깎는 정도가 아니라 숫제 쥐어뜯다시피 하는지라 이발을 할 때마다 대단한 인내심이 요구되었다. 그래도 중학생 체면에 초등학생 시절처럼 “아야! 아야!” 소리를 지를 수 없어서 이를 악물고 비명을 삼켰는데, 웬만한 고통은 내색을 하지 않는 나의 습성은 이미 그 때 길러진 것인지도 모른다.
바리깡은 프랑스에서 처음 만들어져서 일본을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왔다고 한다. 그리고 바리깡이란 이름도 원래는 회사명이었던 것이 일본으로 수입되면서 제품명으로 둔갑했고, 우리나라에 건너와서도 그대로 통용된 것이라고 한다. 국어순화 차원에서 ‘이발기’로 고쳐 부르자는 주장이 있지만 한번 굳어져버린 말이라 쉽사리 바뀌지 않고 있다.
요즘도 이용원에 가면 이 이발기가 있다. 그러나 옛날처럼 손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전기에 꽂아 쓰는 자동식이라 손잡이가 있던 옛 모양과는 많이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성능도 아주 좋아져서 예전처럼 고객의 미간을 찌푸리게 하는 일이 없어졌다.
요즘 같이 고객이 왕인 세상에 옛날처럼 머리칼을 쥐어뜯었다가는 당장 가게 문을 닫아야 하지 않을까.
까까중 모습이라고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요즘 청소년들의 자유로운 머리모습을 보며, ‘세상 참 좋아졌구나!’ 하는 느낌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