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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과 희망 사이

절망과 희망 사이

by 운영자 2014.08.11

절망(絶望)은 희망의 어머니이다. 절망은 바라는 것을 끝내는 것이지만, 끝냄의 자리에 새순이 돋기 때문이다.절망의 ‘절’은 끝낸다는 뜻과 함께 ‘절경(絶景)’과 ‘절세(絶世)의 미인’처럼 ‘절대적인’ 의미도 들어있다.

그러니 끝남의 자리에는 언제나 희망이 숨어 있다. 태풍과 장마로 인명과 재산 피해가 적지 않지만 나무의 상처도 예외가 아니다.

나무들은 세찬 바람이나 비를 맞으면 생존을 위해 몸부림친다. 어떤 나무는 잘 견디지만 그렇지 못한 나무도 있다.

얼마 전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메타세쿼이아가 가지는 물론 목까지 잘렸다. 관리실에서 태풍이 오기 전에 넘어질까 봐 미리 잘라버렸다.

애초부터 아파트 동과 동 사이 통로에 심은 것이 잘못이지만, 그 동안 무성한 ‘메타’는 아파트 주민들의 안식처였다. 그러나 지금은 ‘누드’로 보기도 민망하다.

메타는 가지와 목이 잘리는 순간을 어떻게 맞이했을까. 베는 사람은 그 참담한 심정을 한번이라도 생각했을까.

아무리 큰 바람이 불어도 아파트의 메타가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닐텐데도 ‘과감하게’ 잘라버리는 그 용기는 도대체 어디서 생기는 것일까.

바로 생명에 대한 경외심이 없기 때문이다. 나무는 그냥 목을 잘라도 괜찮다는 생각을 갖고 있지 않고서는 그런 만행을 저지르지는 않을 것이다.

낙우송과의 메타는 은행나무와 소철과 더불어 살아있는 화석이다. 인간이 이 땅에 존재하기 전부터 살았던 나무를 한 순간에 절망의 늪으로 만든 인간의 행동은 용서받을 수 없다.

메타에 집을 짓고 살던 까치, 메타를 놀이터 삼아 살아가던 각종 새와 벌레들도 어디론가 떠났다. 메타의 목이 잘리는 순간, 메타와 삶을 같이했던 많은 생명체들도 길을 잃어버렸다.

이처럼 인간의 만행은 상상할 수 없는 결과를 낳는다. 숲은 더불어 살아가는 삶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지만, 인간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매일 매일 목이 잘린 메타와 눈을 마주하면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다. 울창했던 숲 시절에는 안에 들어가서 소통했지만, 지금은 차마 민낯으로 볼 수 없다.

그러나 메타는 매일 매일 그 처참했던 기억을 뒤로 하고 묵묵히 다시 희망을 만들고 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희망의 싹을 다시 틔울 것이다.

사회 곳곳에서 절망의 소리가 천지를 울린다. 그러나 정치지도자들은 절망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는데 급급하다. 정치가는 국민의 절망을 희망으로 바꿀 의무가 있지만, 선거가 끝나면 그런 희망도 끝난다.

그래서 정치가들에게 국민의 절망을 해결해달라고 할 수 없다. 이제 나무가 자신의 절망을 희망으로 만들어가듯, 국민도 자신의 절망을 희망으로 만들어가야 한다.

국민들은 정치가의 역할을 사라지게 할 의무가 있다. 정치가는 결코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의 국민은 정치가의 지도를 받을 만큼 어리석지 않다. 국민들이 스스로 절망을 희망으로 만들 수 있는 힘을 가질 때, 사회는 건강하고 희망이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