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형
작은형
by 운영자 2014.09.18
“또 그 옷?”방에서 갈아입고 나온 내 오렌지색 티셔츠를 보자 아내가 성화다.
“아니, 옷이 없는 것도 아닌데 일 년 내내 그 낡은 옷이야?”
이런 말 들은 것만도 벌써 수십 번이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오렌지색 티셔츠다.
“편해. 세상에 이 옷만큼 편한 옷 없다구!”
그것 외에 다른 대답이 있을 수 없다. 내가 생각해도 쇠고집이다. 보는 사람도 힘들다는데 내가 좋다는 이유로 맨날 오렌지색 티셔츠다. 얼마나 오래 입었는지 오렌지색이 연한 갈색으로 바랬다.
빛에 비추면 건너편 빛이 훤히 들어온다. 겨울에도 티셔츠를 입으니까 2,3년간 사계절을 입어왔다. 다른 옷들, 그러니까 산 지 얼마 안 된 옷들은 편하지 않다. 옷의 스타일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그 탓에 몸이 옷에 구속되는 느낌이다.
그런데 오래 입은 오렌지색 티셔츠는 다르다. 새 옷이 갖는 깔깔하고 모난 성질을 버렸다. 비록 헐렁해 보이지만 부드럽다. 입었는데도 입었는지 모를 만큼 살갗과의 마찰이 없다.
옷이 내 몸을 간섭을 하지 않는다. 입었으나 입지 않은 듯 한 몸의 자유로움을 배려한다.
그뿐인가? 어쩌다 국물을 뜨다 흘리기라도 할 때에 보면 안다. 빳빳한 성질을 가진 티셔츠라면 가슴위에 떨어진 국물을 데구르르 굴려 바지 지퍼 위에 털썩 주저앉힐 거다.
그러나 오렌지색 티셔츠는 국물을 배척하지 않는다.
제 몸으로 다 흡수해 버린다. 누워도 편하고, 뒹굴뒹굴 뒹굴어도 편하다. 험한 일을 해도 좋다.
쉬이 벗어던질 수 있으니까. 아내가 ‘그 옷?’이라고 얕보는 오렌지색 티셔츠는 그런 이유로 내 곁에 오래 남아 있다.
사람 중에 그런 사람이 있다. 작은형이다. 때로 작은형을 찾아가 내 일상의 고단한 푸념을 늘어놓으면 그래, 그렇지, 그렇구말구, 암, 잘 했구나, 그러며 척척 말대답을 해준다.
그렇고 그런 이야기지만 처음 듣는 것처럼 귀 기울인다. 어떤 국물을 떨어뜨려도 제 성질을 드러내지 않고 다 받아준다. 어깨에 힘을 주지 않는다. ‘내 생각에는........’ 하고 어쭙잖은 해결책을 내놓지 않는다.
그저 속이 후련하게 들어준다. 떨어지는 국물을 흡수하듯이.
어렸을 적이다. 아버지한테 야단을 맞으면 어머니 뒤로 돌아가 치마폭을 잡고 울었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밀막아주기 때문에 어머니 뒤에 숨어 운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즈음에 와 생각해 보면 오래 입으신 어머니의 낡은 치맛자락이 내 눈물을 받아주었기 때문인 듯하다.
나는 오래된 내 오렌지색 티셔츠가 좋다. 오렌지색 티셔츠 같은 식구가 되고 싶다. 젊었을 때는 존재감을 위해 목소리를 냈지만 이쯤 살아보니 아니다.
입었으면서도 입지 않은 듯 한 오래된 티셔츠처럼 있으면서도 없는 듯 한 편안한 아버지지가 되거나 남편이 되거나 그러고 싶다.
우리 형제들은 모두 작은형을 좋아했다. 마치 나의 오렌지색 티셔츠처럼 무슨 일이 생기면 먼저 작은형하고 이야기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작은형의 마음은 형제들의 목소리로 얼룩져있었다. 오렌지색 티셔츠를 보면 그런 작은형이 생각난다.
“아니, 옷이 없는 것도 아닌데 일 년 내내 그 낡은 옷이야?”
이런 말 들은 것만도 벌써 수십 번이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오렌지색 티셔츠다.
“편해. 세상에 이 옷만큼 편한 옷 없다구!”
그것 외에 다른 대답이 있을 수 없다. 내가 생각해도 쇠고집이다. 보는 사람도 힘들다는데 내가 좋다는 이유로 맨날 오렌지색 티셔츠다. 얼마나 오래 입었는지 오렌지색이 연한 갈색으로 바랬다.
빛에 비추면 건너편 빛이 훤히 들어온다. 겨울에도 티셔츠를 입으니까 2,3년간 사계절을 입어왔다. 다른 옷들, 그러니까 산 지 얼마 안 된 옷들은 편하지 않다. 옷의 스타일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그 탓에 몸이 옷에 구속되는 느낌이다.
그런데 오래 입은 오렌지색 티셔츠는 다르다. 새 옷이 갖는 깔깔하고 모난 성질을 버렸다. 비록 헐렁해 보이지만 부드럽다. 입었는데도 입었는지 모를 만큼 살갗과의 마찰이 없다.
옷이 내 몸을 간섭을 하지 않는다. 입었으나 입지 않은 듯 한 몸의 자유로움을 배려한다.
그뿐인가? 어쩌다 국물을 뜨다 흘리기라도 할 때에 보면 안다. 빳빳한 성질을 가진 티셔츠라면 가슴위에 떨어진 국물을 데구르르 굴려 바지 지퍼 위에 털썩 주저앉힐 거다.
그러나 오렌지색 티셔츠는 국물을 배척하지 않는다.
제 몸으로 다 흡수해 버린다. 누워도 편하고, 뒹굴뒹굴 뒹굴어도 편하다. 험한 일을 해도 좋다.
쉬이 벗어던질 수 있으니까. 아내가 ‘그 옷?’이라고 얕보는 오렌지색 티셔츠는 그런 이유로 내 곁에 오래 남아 있다.
사람 중에 그런 사람이 있다. 작은형이다. 때로 작은형을 찾아가 내 일상의 고단한 푸념을 늘어놓으면 그래, 그렇지, 그렇구말구, 암, 잘 했구나, 그러며 척척 말대답을 해준다.
그렇고 그런 이야기지만 처음 듣는 것처럼 귀 기울인다. 어떤 국물을 떨어뜨려도 제 성질을 드러내지 않고 다 받아준다. 어깨에 힘을 주지 않는다. ‘내 생각에는........’ 하고 어쭙잖은 해결책을 내놓지 않는다.
그저 속이 후련하게 들어준다. 떨어지는 국물을 흡수하듯이.
어렸을 적이다. 아버지한테 야단을 맞으면 어머니 뒤로 돌아가 치마폭을 잡고 울었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밀막아주기 때문에 어머니 뒤에 숨어 운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즈음에 와 생각해 보면 오래 입으신 어머니의 낡은 치맛자락이 내 눈물을 받아주었기 때문인 듯하다.
나는 오래된 내 오렌지색 티셔츠가 좋다. 오렌지색 티셔츠 같은 식구가 되고 싶다. 젊었을 때는 존재감을 위해 목소리를 냈지만 이쯤 살아보니 아니다.
입었으면서도 입지 않은 듯 한 오래된 티셔츠처럼 있으면서도 없는 듯 한 편안한 아버지지가 되거나 남편이 되거나 그러고 싶다.
우리 형제들은 모두 작은형을 좋아했다. 마치 나의 오렌지색 티셔츠처럼 무슨 일이 생기면 먼저 작은형하고 이야기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작은형의 마음은 형제들의 목소리로 얼룩져있었다. 오렌지색 티셔츠를 보면 그런 작은형이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