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계종택과 굴참나무
묵계종택과 굴참나무
by 운영자 2014.09.22
한국의 종택은 전통의 계승이라는 점에서 아주 소중하다. 특히 종택을 지키고 있는 후손들의 삶은 존경스럽다. 그래서 나는 종택을 찾을 때마다 조심스럽다.종택의 분위기가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나 같은 사람은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다. 나는 그 분들이 지키고 있는 전통에 티끌 하나 보태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최근에 연속으로 두 차례나 찾은 안동 길안의 묵계종택(溪宗宅)도 후손들의 정성 덕분에 찾는 사람을 무척 감동시킨다. 특히 묵계종택 대문 앞의 아주 큰 나무는 그 어떤 종택보다 나를 흥분시켰다.
종택의 큰 나무는 종택의 역사를 드러낸다. 묵계종택의 큰 나무도 집 주인공을 닮은 셈이다.
묵계종택은 묵계리에 위치해서 붙인 이름이고,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 1431-1521)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보백당’은 ‘청백(淸白)’을 보배로 여긴다는 뜻이다.
그래서 김계행은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청백리(淸白吏)로 꼽힌다. 그는 점필재(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과 교유했으며, 성주·충주에서 사학(四學)교수를 지냈고, 1480년(성종 11)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고령현감·부수찬(副修撰) 등을 비롯해 삼사(三司)의 요직을 두루 지내며 간쟁업무에 힘썼다. 연산군 때 대사간(大司諫)에 있으면서 척신들의 비위를 논박했지만, 시정될 가망이 없자 벼슬을 버리고 안동 풍산(豊山)에 은거했다.
종택 대문 앞의 큰 나무는 참나뭇과의 굴참나무이다. 그러나 나무 앞 돌에는 이 나무를 200살 정도의 상수리나무라 적었다.
상수리나무와 굴참나무는 관찰하지 않으면 오해하기 쉽다. 나뭇잎이 아주 비슷하기 때문이다. 상수리나무와 굴참나무를 구분하는 방법은 크게 껍질과 잎이다.
상수리나무의 껍질은 코르크가 두껍지 않은 반면 굴참나무는 아주 강하다.
그래서 굴참나무의 껍질을 ‘굴피’라 부르고, 굴피로 만든 집을 ‘굴피집’이라 부른다. 그러나 굴참나무의 껍질은 어린 나이에는 두껍지 않아서 상수리나무와의 구분이 결코 쉽지 않다. 그래서 두 나무는 잎으로 구분하는 것이 확실하다.
상수리나무는 잎의 앞뒤 색깔이 아주 비슷하지만 굴참나무는 앞과 뒤의 색깔이 다르다. 굴참나무의 잎 뒷면은 은색이다. 두 나무의 열매도 아주 비슷하다.
나는 안동시청에 전화를 걸어 나무이름의 고쳐달라고 요청했다. 담당 공무원은 아주 상냥하게 나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언젠가 다시 찾아가서 확인할 것이다. 묵계종택 대문 앞의 두 그루 굴참나무는 김계행 선생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또 하나의 문화재이다.
아주 곧게 자란 두 그루의 굴참나무는 보백당 선생의 청백 정신과 닮았다. 나무는 그 자체로 청백이다.
군더더기 하나 없는 모습부터 곧은 자세로 살아가는 삶의 방식까지 선비의 기상을 닮았기 때문이다.
묵계종택 대문 앞에는 굴참나무 외에도 열매로 염주를 만드는 모감주나무도 한 그루 우뚝하다.
인간이 대대로 살아가는 전통문화공간에 살고 있는 한 그루 나무는 문화재를 한층 돋보이게 할 뿐 아니라 삶의 나침반이다.
그러나 사람의 정성 없이는 오랫동안 나무와 함께 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묵계종택의 굴참나무에 큰 관심을 갖는다.
내가 최근에 연속으로 두 차례나 찾은 안동 길안의 묵계종택(溪宗宅)도 후손들의 정성 덕분에 찾는 사람을 무척 감동시킨다. 특히 묵계종택 대문 앞의 아주 큰 나무는 그 어떤 종택보다 나를 흥분시켰다.
종택의 큰 나무는 종택의 역사를 드러낸다. 묵계종택의 큰 나무도 집 주인공을 닮은 셈이다.
묵계종택은 묵계리에 위치해서 붙인 이름이고,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 1431-1521)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보백당’은 ‘청백(淸白)’을 보배로 여긴다는 뜻이다.
그래서 김계행은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청백리(淸白吏)로 꼽힌다. 그는 점필재(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과 교유했으며, 성주·충주에서 사학(四學)교수를 지냈고, 1480년(성종 11)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고령현감·부수찬(副修撰) 등을 비롯해 삼사(三司)의 요직을 두루 지내며 간쟁업무에 힘썼다. 연산군 때 대사간(大司諫)에 있으면서 척신들의 비위를 논박했지만, 시정될 가망이 없자 벼슬을 버리고 안동 풍산(豊山)에 은거했다.
종택 대문 앞의 큰 나무는 참나뭇과의 굴참나무이다. 그러나 나무 앞 돌에는 이 나무를 200살 정도의 상수리나무라 적었다.
상수리나무와 굴참나무는 관찰하지 않으면 오해하기 쉽다. 나뭇잎이 아주 비슷하기 때문이다. 상수리나무와 굴참나무를 구분하는 방법은 크게 껍질과 잎이다.
상수리나무의 껍질은 코르크가 두껍지 않은 반면 굴참나무는 아주 강하다.
그래서 굴참나무의 껍질을 ‘굴피’라 부르고, 굴피로 만든 집을 ‘굴피집’이라 부른다. 그러나 굴참나무의 껍질은 어린 나이에는 두껍지 않아서 상수리나무와의 구분이 결코 쉽지 않다. 그래서 두 나무는 잎으로 구분하는 것이 확실하다.
상수리나무는 잎의 앞뒤 색깔이 아주 비슷하지만 굴참나무는 앞과 뒤의 색깔이 다르다. 굴참나무의 잎 뒷면은 은색이다. 두 나무의 열매도 아주 비슷하다.
나는 안동시청에 전화를 걸어 나무이름의 고쳐달라고 요청했다. 담당 공무원은 아주 상냥하게 나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언젠가 다시 찾아가서 확인할 것이다. 묵계종택 대문 앞의 두 그루 굴참나무는 김계행 선생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또 하나의 문화재이다.
아주 곧게 자란 두 그루의 굴참나무는 보백당 선생의 청백 정신과 닮았다. 나무는 그 자체로 청백이다.
군더더기 하나 없는 모습부터 곧은 자세로 살아가는 삶의 방식까지 선비의 기상을 닮았기 때문이다.
묵계종택 대문 앞에는 굴참나무 외에도 열매로 염주를 만드는 모감주나무도 한 그루 우뚝하다.
인간이 대대로 살아가는 전통문화공간에 살고 있는 한 그루 나무는 문화재를 한층 돋보이게 할 뿐 아니라 삶의 나침반이다.
그러나 사람의 정성 없이는 오랫동안 나무와 함께 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묵계종택의 굴참나무에 큰 관심을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