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자식 농사

자식 농사

by 운영자 2014.11.28

교차로협의회 직원으로부터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시인님과 꼭 통화를 하고 싶다는 여성분의 전화를 받았다.”라며 전화번호와 이름, 남편의 성함까지 꼼꼼하게 메모했다가 알려줬다. “환절기 건강관리 잘 하시라”는 친절한 안부와 함께.가족처럼 지내던 후배의 아내다. 후배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가난하지만 성품이 밝고 구김살이 없었다. 경남 항구도시의 한 업체에 취업을 주선해주기도 했다.

결혼 후 잊혀지지 않을 만큼 안부 전화를 하던 그가 어느 날 아침 산책을 나갔다가 심장마비로 타계했다는 부음을 들었다. 젊은 아내와 올망졸망한 딸 셋을 남기고 떠났다. 그를 영안실 영정으로 본 것이 마지막이다.

몇 해 전인지도 아득하다. 한 두 해 정도 집 사람이 그의 아내와 통화하면서 안부를 주고받았지만 무정한 세월 속에 묻혀버렸다.

전화기 너머로 들여오는 그녀의 목소리는 밝고 맑았다. 남편과 사별한지 어느새 17년, 직장생활을 하며 딸 셋을 잘 키웠다. 맏딸은 영어교사로 동료 교사와 지난해 결혼했다. 둘째 딸은 의료연구기관 연구원으로 일한다고 한다.

아버지가 타계할 때 일곱 살이던 막내딸은 올해 대학 졸업과 함께 공공기관에 취직했다니 흐뭇하고 반갑다. ‘될 성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딸들은 장학금을 받거나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엄마의 부담을 덜어드렸을 것이다.

혼자 살면서 자식 농사 잘 지었으니 불행 끝, 행복 시작이 되기를 바랄뿐이다.

교육열이 뜨거운 우리나라에서 ‘자식 농사 잘 지으려면 등골이 빠진다’는 게 결코 빈 말은 아니다.

최근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보고서에 따르면 자녀가 초등학교에 입학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양육비로 1인당 평균 1억 6438만 원을 쓰는 것으로 나타났다(2012년 기준). 그 가운데 사교육비가 80%로 1억 3000만 원 가까이 든다. 자녀의 미래가 사교육에 좌우된다는 믿음 때문이다.

영유아 시절 양육비, 대학 학비, 결혼 비용까지 더하면 자식 한 명 키우는 데 3억 4000만∼3억 5000만 원이 든다니 등골이 휠 수밖에 없다.

부모는 노후 대비조차 못하며 자식에게 투자하지만 자녀의 미래에 대한 기대감은 갈수록 낮아지고 있다. ‘자녀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나보다 높아질 거라 보는가’란 질문에 1994년 10명 중 6명이 ‘가능성이 높다’고 기대했으나 지난해는 43.8%가 ‘가능성이 낮다’고 응답했다.

소 팔고 논 팔아 공부시키면 나중에 그 자식이 성공으로 보답하던 시대가 이미 지났음을 보여준다. 베이비부머들은 부모를 봉양하는 마지막 세대, 자식의 봉양을 못 받는 첫 세대라고 자조하는 이유다.

자식에게 봉양 받기는커녕 대학 나온 자식이 취직도 안 되고 ‘캥거루족(族)’으로 부모에게 기대어 사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가. 연애·결혼·출산·인간관계·내 집 마련 등 5개의 미래를 포기한 ‘5포 세대’ 자식들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은 새까맣게 타들어 갈 정도로 자식 농사는 어렵다.

‘세상에서 가장 부실한 보험은 자식 보험’이라는 영국 속담도 우리와 별반 다를 바 없다. 자식 농사 잘 지으려다 ‘노후 쪽박’을 차지 않으려면 자식에게 자립심을 키워주고, 분명하게 선을 그을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