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파티
이혼 파티
by 운영자 2014.12.19
연극 ‘이혼 파티’를 본 것이 까마득하다. 가물거리는 기억을 인터넷이 되살려준다. 1977년 제1회 대한민국연극제 수상작이다.교수인 남편과 의사 부인이 겪는 부부의 소소한 일상과 서로에게 멀어져 가는 과정을 코믹터치로 그렸다.
초연 때는 임동진이 주인공을 맡았으나 그 뒤 출연진이 바뀌며 여러 차례 무대에 올랐다. 부부들의 허상과 실상을 풍자한 것이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미국 뉴욕에서는 8인조 밴드까지 동원한 호화 이혼식이 열려 화제가 됐다. 보도에 따르면 이혼 케이크는 신부가 신랑을 벼랑으로 밀어뜨리는 모형으로 만들어 놓았다. 결혼식 때와 달리 아버지가 혼자 걸어 들어가 이혼녀 딸을 데리고 퇴장한다.
결혼식에서 신부가 던진 부케를 받았던 들러리는 이혼녀에게 다시 꽃을 던져 신부 자격이 회복됐음을 선포했다. 이혼이 늘고 있는 미국에선 이혼 파티 기획업자에 ‘이혼학’ 교수까지 생겼다니 세태의 변화가 실감난다.
우리나라 이혼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 가장 높다. 2013년 이혼 건수는 11만 5300여 건으로 하루 316쌍이 이혼한 셈이다.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살라”는 주례의 당부가 무색해졌다.
가뜩이나 아이 안 낳는 나라에서 10명 가운데 4명꼴로 이혼하다 보니 ‘이혼 플래너’라는 이색 직업까지 등장했다.
이혼 이후의 경제문제, 자녀교육, 우울증 극복 등 인생 전반에 걸쳐 조언하고 관리해 준다고 한다.
지난 10월에는 이혼문제를 다룬 이혼전문잡지 월간 ‘디보싱’(Divocing)이 창간됐다니 이혼 보편화 시대의 새로운 풍속도다.
얼마 전, 가까운 친인척이 ‘이혼 파티’를 열고 이혼을 공식선언했다.
이혼을 수치로 알던 시대를 살아왔기에 당혹스럽고 껄끄러워 망설였으나 집에서 음식을 준비하고 초청하여 참석했다. 원수처럼 등을 돌리고 헤어질 게 아니라 좋은 감정으로 헤어지고 싶다며 식사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결혼 31년차, 남매를 훌륭하게 키워 짝을 이뤘고 손자까지 받으니 황혼이혼인 셈이다. 남이 알까봐 쉬쉬하며 혼자 가슴앓이 하던 시절은 옛날 얘기가 됐다.
협의 이혼 숙려기간 때 질녀는 내게 “이제 저 자신을 위해 결심했다.”고 속내를 털어 놓았다. 그래도 누군가는 나서서 만류해야겠기에 질서(姪壻)를 만나 “신중하게 생각하라.”고 간곡히 당부했다.
가난한 시절 만나 식당을 운영하며 살림을 일궜고 자식농사도 잘 지었다. 부부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신심이 두텁고 일상의 일탈도 없었다.
가장 큰 걸림돌은 성격차이다. 굳어버린 성격을 바꾸기란 쉽지 않지만 이혼 사유가 될 정도는 아니다.
황혼의 협의 이혼이란 것이 참 허망하다. 재산에 대한 분란이나 자식 양육을 둘러싼 첨예한 이견이 없는 만큼, 말 그대로 부부가 협의하면 끝이다.
살림을 꾸려온 여자는 이혼 후 생활의 변화 폭이 그리 크지 않지만 남자에게는 식사를 챙겨야 하는 등 당장 힘든 생활을 해야 한다. “되돌릴 수 없는 선택을 한만큼 달라진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모든 허물은 덮고 서로에게 행복을 바라는 마음으로 살아주기 바란다.”는 ‘이혼 덕담’을 하면서도 뒷맛은 씁쓸하다.
초연 때는 임동진이 주인공을 맡았으나 그 뒤 출연진이 바뀌며 여러 차례 무대에 올랐다. 부부들의 허상과 실상을 풍자한 것이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미국 뉴욕에서는 8인조 밴드까지 동원한 호화 이혼식이 열려 화제가 됐다. 보도에 따르면 이혼 케이크는 신부가 신랑을 벼랑으로 밀어뜨리는 모형으로 만들어 놓았다. 결혼식 때와 달리 아버지가 혼자 걸어 들어가 이혼녀 딸을 데리고 퇴장한다.
결혼식에서 신부가 던진 부케를 받았던 들러리는 이혼녀에게 다시 꽃을 던져 신부 자격이 회복됐음을 선포했다. 이혼이 늘고 있는 미국에선 이혼 파티 기획업자에 ‘이혼학’ 교수까지 생겼다니 세태의 변화가 실감난다.
우리나라 이혼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 가장 높다. 2013년 이혼 건수는 11만 5300여 건으로 하루 316쌍이 이혼한 셈이다.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살라”는 주례의 당부가 무색해졌다.
가뜩이나 아이 안 낳는 나라에서 10명 가운데 4명꼴로 이혼하다 보니 ‘이혼 플래너’라는 이색 직업까지 등장했다.
이혼 이후의 경제문제, 자녀교육, 우울증 극복 등 인생 전반에 걸쳐 조언하고 관리해 준다고 한다.
지난 10월에는 이혼문제를 다룬 이혼전문잡지 월간 ‘디보싱’(Divocing)이 창간됐다니 이혼 보편화 시대의 새로운 풍속도다.
얼마 전, 가까운 친인척이 ‘이혼 파티’를 열고 이혼을 공식선언했다.
이혼을 수치로 알던 시대를 살아왔기에 당혹스럽고 껄끄러워 망설였으나 집에서 음식을 준비하고 초청하여 참석했다. 원수처럼 등을 돌리고 헤어질 게 아니라 좋은 감정으로 헤어지고 싶다며 식사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결혼 31년차, 남매를 훌륭하게 키워 짝을 이뤘고 손자까지 받으니 황혼이혼인 셈이다. 남이 알까봐 쉬쉬하며 혼자 가슴앓이 하던 시절은 옛날 얘기가 됐다.
협의 이혼 숙려기간 때 질녀는 내게 “이제 저 자신을 위해 결심했다.”고 속내를 털어 놓았다. 그래도 누군가는 나서서 만류해야겠기에 질서(姪壻)를 만나 “신중하게 생각하라.”고 간곡히 당부했다.
가난한 시절 만나 식당을 운영하며 살림을 일궜고 자식농사도 잘 지었다. 부부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신심이 두텁고 일상의 일탈도 없었다.
가장 큰 걸림돌은 성격차이다. 굳어버린 성격을 바꾸기란 쉽지 않지만 이혼 사유가 될 정도는 아니다.
황혼의 협의 이혼이란 것이 참 허망하다. 재산에 대한 분란이나 자식 양육을 둘러싼 첨예한 이견이 없는 만큼, 말 그대로 부부가 협의하면 끝이다.
살림을 꾸려온 여자는 이혼 후 생활의 변화 폭이 그리 크지 않지만 남자에게는 식사를 챙겨야 하는 등 당장 힘든 생활을 해야 한다. “되돌릴 수 없는 선택을 한만큼 달라진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모든 허물은 덮고 서로에게 행복을 바라는 마음으로 살아주기 바란다.”는 ‘이혼 덕담’을 하면서도 뒷맛은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