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橫說)과 ‘수설(樹說)’
횡설(橫說)과 ‘수설(樹說)’
by 운영자 2014.12.29
횡설수설(橫說竪說)은 얘기를 오락가락할 때 사용하는 단어이다. 횡설은 가로 얘기이고, 수설은 세로 이야기이다.얘기에 조리가 없을 때 사용하는 횡설수설은 좋지 않은 뜻이다.
그러나 횡설은 반드시 좋지 않은 뜻은 아니다. 가로는 수평이다. 그래서 횡설은 수평적 얘기이다.
나는 횡설을 좋아한다. 많은 사람들이 세로의 얘기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수설은 수직의 얘기이다. 수설은 수직사회에 익숙한 얘기를 뜻할지도 모른다.
수설은 상하관계를 좋아하는 한국사회에 적합한 얘기 패턴이다. 연말연시 모임의 경우 주로 나이가 많거나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얘길 주도한다. 나이가 어리거나 지위가 낮은 사람들은 얘기할 기회가 거의 없다.
지위가 낮거나 나이가 적은 사람들이 얘기를 하지 못하는 것은 연장자나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얘기를 독점한 채 그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횡설이 없으면 얘기는 언제나 일방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일방적인 얘기는 창조적이지도 생산적이지도 않다. 어떤 조직이든 일방적인 얘기가 지배하면 정상적으로 운영할 수 없다.
가장 창조적인 조직은 수설만이 아니라 횡설이 철저하게 보장한다. 나는 나무의 얘기를 ‘수설(樹說)’이라 부른다. 이는 횡설도 나무와 관련한 단어라서 횡설수설에 빗댄 조어(造語)지만, 조어한 횡설수설은 나름대로 깊은 뜻을 함축하고 있다.
나무가 전하는 소리는 각양각색이다. 나무는 사계절 동안 정말 엄청난 얘기를 들려주지만, 인간은 나무가 전하는 얘기의 절반도 듣지 못한다.
나무가 다양한 얘기를 들려줄 수 있는 것은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변하기 때문이다. 인간이든 식물이든 변하지 않으면 다양한 얘기를 들려줄 수 없다.
사람들이 연말을 맞아 지난 한 해를 돌이켜보지만, 다양한 얘기를 만나기 어렵다.
친구 간에도 만나서 얘기하는 내용을 보면 늘 그렇고 그런 얘기로 가득하다. 나무는 한 번도 같은 얘기를 전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무의 얘기는 언제나 새롭다. 새롭다는 것은 묵은 것을 잘라낼 때만이 가능하다. 자신의 몸에 품고 있는 묵은 것을 걷어내야만 새로운 얘기를 담을 수 있다. 나무는 묵은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만들면서 우리들에게 새로운 얘기를 전한다. 그래서 나무의 얘기는 언제나 싱싱해서 질리지 않는다.
세상에는 묵은 얘기로 가득하다. 곳곳에서 들리는 아우성은 대부분 묵은 소리에 불과하다. 새로운 얘기를 만들지 못하는 한국의 미래는 결코 밟지 않다.
정치지도자들은 물론 그 누구도 새로운 얘기를 하지 않는다. 케케묵은 소리만 천지에 진동할 뿐이다.
한국 사회에 케케묵은 소리만 난무하는 것은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변하지 않으면서 입만 열면 변화를 주장한다.
그래서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구린내만 풍길 뿐이다. 위대한 지도자는 결코 변명하지 않지만, 한국의 최고지도자는 변명만 뇌까린다. 벌써 천박한 언어로 변명에 익숙하다.
적어도 변명을 하려면 “소크라테스의 변명” 정도라야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양의 해를 맞아 말울음소리처럼 큰 소리만 울리는 사회가 아니라 소곤소곤 정겨운 소리가 세상을 밝혀야 한다.
그러나 횡설은 반드시 좋지 않은 뜻은 아니다. 가로는 수평이다. 그래서 횡설은 수평적 얘기이다.
나는 횡설을 좋아한다. 많은 사람들이 세로의 얘기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수설은 수직의 얘기이다. 수설은 수직사회에 익숙한 얘기를 뜻할지도 모른다.
수설은 상하관계를 좋아하는 한국사회에 적합한 얘기 패턴이다. 연말연시 모임의 경우 주로 나이가 많거나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얘길 주도한다. 나이가 어리거나 지위가 낮은 사람들은 얘기할 기회가 거의 없다.
지위가 낮거나 나이가 적은 사람들이 얘기를 하지 못하는 것은 연장자나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얘기를 독점한 채 그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횡설이 없으면 얘기는 언제나 일방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일방적인 얘기는 창조적이지도 생산적이지도 않다. 어떤 조직이든 일방적인 얘기가 지배하면 정상적으로 운영할 수 없다.
가장 창조적인 조직은 수설만이 아니라 횡설이 철저하게 보장한다. 나는 나무의 얘기를 ‘수설(樹說)’이라 부른다. 이는 횡설도 나무와 관련한 단어라서 횡설수설에 빗댄 조어(造語)지만, 조어한 횡설수설은 나름대로 깊은 뜻을 함축하고 있다.
나무가 전하는 소리는 각양각색이다. 나무는 사계절 동안 정말 엄청난 얘기를 들려주지만, 인간은 나무가 전하는 얘기의 절반도 듣지 못한다.
나무가 다양한 얘기를 들려줄 수 있는 것은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변하기 때문이다. 인간이든 식물이든 변하지 않으면 다양한 얘기를 들려줄 수 없다.
사람들이 연말을 맞아 지난 한 해를 돌이켜보지만, 다양한 얘기를 만나기 어렵다.
친구 간에도 만나서 얘기하는 내용을 보면 늘 그렇고 그런 얘기로 가득하다. 나무는 한 번도 같은 얘기를 전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무의 얘기는 언제나 새롭다. 새롭다는 것은 묵은 것을 잘라낼 때만이 가능하다. 자신의 몸에 품고 있는 묵은 것을 걷어내야만 새로운 얘기를 담을 수 있다. 나무는 묵은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만들면서 우리들에게 새로운 얘기를 전한다. 그래서 나무의 얘기는 언제나 싱싱해서 질리지 않는다.
세상에는 묵은 얘기로 가득하다. 곳곳에서 들리는 아우성은 대부분 묵은 소리에 불과하다. 새로운 얘기를 만들지 못하는 한국의 미래는 결코 밟지 않다.
정치지도자들은 물론 그 누구도 새로운 얘기를 하지 않는다. 케케묵은 소리만 천지에 진동할 뿐이다.
한국 사회에 케케묵은 소리만 난무하는 것은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변하지 않으면서 입만 열면 변화를 주장한다.
그래서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구린내만 풍길 뿐이다. 위대한 지도자는 결코 변명하지 않지만, 한국의 최고지도자는 변명만 뇌까린다. 벌써 천박한 언어로 변명에 익숙하다.
적어도 변명을 하려면 “소크라테스의 변명” 정도라야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양의 해를 맞아 말울음소리처럼 큰 소리만 울리는 사회가 아니라 소곤소곤 정겨운 소리가 세상을 밝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