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 해맞이 단상
신년 해맞이 단상
by 운영자 2015.01.06
새해 아침 해돋이를 보러 산에 올랐다.간밤에 텔레비전 연예대상 시상식을 보느라고 잠이 좀 부족했지만 그렇다고 연례행사를 빼먹을 수는 없는 일이다. 여섯시 휴대전화 경보에 맞춰 일어났다.
내가 가는 산은 가까운 동네 뒷산이다. 어떤 이들은 일출을 본다고 하루 전부터 동해안으로도 떠나고, 여수 향일암으로도 가지만, 나는 그럴 생각까지는 없다. 어디서 보든지 똑같은 해가 아닌가?
산마루에 오르니 벌써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다. 참 부지런한 사람들이다. 누가 시키기라도 한 듯 하나같이 동쪽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미명(未明)의 하늘 뿌연 안개 속에 발그레한 기운이 서려 있다.
저 곳에서 해가 뜰 모양이다. 그런데 오늘 해돋이를 제대로 볼 수 있으려나? 지난해도 날씨가 흐려서 일출을 못 봤는데, 어제 일기예보에도 금년 해맞이가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해맞이를 할 때면 학창시절 국어책에 나온 <동명일기(東溟日記)>가 생각난다. 조선시대 어느 지방관의 마나님이 쓴 기행문인데, 추운 새벽에 시종들을 이끌고 동해에 나가 해돋이의 장관을 본 감격을 표현했다.
쟁반 같은 해가 수레바퀴처럼 커졌노라는 대목이 인상 깊었는데, 선인들도 해돋이를 그렇게 구경거리로 삼았던 모양이다.
사실 과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밤과 낮의 변화는 지구의 자전에 따른 것인 만큼 어제의 해나 오늘의 해나 특별히 다를 것이 없다. 해(年)의 바뀜 또한 지구의 공전에 의한 자연의 순환으로서 작년과 올해의 경계가 따로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이 밤과 낮을 나누어 날짜를 정하고, 그것을 묶어 주일과 달(月)과 해와 같이 시간의 매듭을 만들어놓은 것은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이러한 매듭이 없다면 우리는 막연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미아가 될지도 모른다. 다행히 우리는 시간의 매듭이 있기에 삶의 과정에 단락을 짓고 새날을 기약할 수 있는 것이다.
시계가 일곱 시 반을 가리킬 즈음, 동녘하늘 구름 가장자리에 빨간 불이 붙는다. 흡사 산불이 긴 띠를 이루며 타들어가는 모습이다. 운 좋게도 오늘 해돋이를 볼 수 있겠다는 예감이 든다.
참!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일출을 보면서 오늘 무엇을 소망할까? 올해의 희망사항을 하나씩 떠올려본다. 가족의 건강과 평안, 직장생활의 무사, 아이들의 결혼 따위에 생각이 미친다. 언제나 빤한 소망인데, 무엇보다 올해는 과년한 아이의 혼사가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사실 새해 아침에 소망을 빈다고 해서 그게 이루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합리주의자의 눈에는 이처럼 자연물에 기도하는 행위가 어리석어 보일지 모른다. 신앙을 갖는 것도 부질없는 일로 여기지 않을까 싶다.
독일의 철학자 포이어바흐(Feuerbach)나 니체(Nietzsche) 같은 이는 신의 존재를 부정했다.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창조한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렇지만 세상을 꼭 그렇게 보는 것이 현명할까? 나도 한 때 그런 시각을 가진 때가 있었으나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나는 프랑스 철학자 파스칼(Pascal)의 견해를 지지하는 편이다.
신앙을 인간의 삶의 가장 높은 질서로 파악한 그는 전능한 신의 존재 여부는 인간의 지혜로서 알 수 없는 문제라고 못 박았다.
그리고 신이 없다고 믿는 것보다 있다고 믿는 것이 훨씬 인간에게 행복하다고 말했다. 결국 해답은 내 마음가짐에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내가 어떻게 마음먹느냐에 따라 세상이 달리 보이는 것이다.
내가 절실하게 소망하고 이루어지리라고 기대하면 우선 내 마음이 편하다. 설사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기대와 희망을 품는 그 자체가 행복이 아닌가!
와!
갑자기 사람들의 탄성이 터진다.
태양이 구름 너머로 반짝 이마를 드러낸다. 다들 휴대전화로 사진 찍기에 바쁘다. 불덩이가 점차 커진다. 바람 빠진 축구공이 부풀어 오르듯, 머금었던 꽃봉오리가 터지듯 떠오르는 해의 모양새가 시시각각 달라진다. 마침내 수박덩이 같은 해가 두둥실 구름 위로 솟으며 보석처럼 빛을 발한다.
대박이다! 올해 해돋이는 정말 환상이다. 오랜만에 일출을 제대로 봤다는 희열감! 휴대전화 일출사진을 아내와 아이들에게 전송했다.
일기예보 핑계를 대며 산에 따라오지 않은 아내가 부러워하겠지. 춥지만 해맑은 새해 첫날, 올해 모든 일들이 만사형통하기를! 떠오르는 태양처럼 찬란하기를!
내가 가는 산은 가까운 동네 뒷산이다. 어떤 이들은 일출을 본다고 하루 전부터 동해안으로도 떠나고, 여수 향일암으로도 가지만, 나는 그럴 생각까지는 없다. 어디서 보든지 똑같은 해가 아닌가?
산마루에 오르니 벌써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다. 참 부지런한 사람들이다. 누가 시키기라도 한 듯 하나같이 동쪽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미명(未明)의 하늘 뿌연 안개 속에 발그레한 기운이 서려 있다.
저 곳에서 해가 뜰 모양이다. 그런데 오늘 해돋이를 제대로 볼 수 있으려나? 지난해도 날씨가 흐려서 일출을 못 봤는데, 어제 일기예보에도 금년 해맞이가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해맞이를 할 때면 학창시절 국어책에 나온 <동명일기(東溟日記)>가 생각난다. 조선시대 어느 지방관의 마나님이 쓴 기행문인데, 추운 새벽에 시종들을 이끌고 동해에 나가 해돋이의 장관을 본 감격을 표현했다.
쟁반 같은 해가 수레바퀴처럼 커졌노라는 대목이 인상 깊었는데, 선인들도 해돋이를 그렇게 구경거리로 삼았던 모양이다.
사실 과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밤과 낮의 변화는 지구의 자전에 따른 것인 만큼 어제의 해나 오늘의 해나 특별히 다를 것이 없다. 해(年)의 바뀜 또한 지구의 공전에 의한 자연의 순환으로서 작년과 올해의 경계가 따로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이 밤과 낮을 나누어 날짜를 정하고, 그것을 묶어 주일과 달(月)과 해와 같이 시간의 매듭을 만들어놓은 것은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이러한 매듭이 없다면 우리는 막연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미아가 될지도 모른다. 다행히 우리는 시간의 매듭이 있기에 삶의 과정에 단락을 짓고 새날을 기약할 수 있는 것이다.
시계가 일곱 시 반을 가리킬 즈음, 동녘하늘 구름 가장자리에 빨간 불이 붙는다. 흡사 산불이 긴 띠를 이루며 타들어가는 모습이다. 운 좋게도 오늘 해돋이를 볼 수 있겠다는 예감이 든다.
참!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일출을 보면서 오늘 무엇을 소망할까? 올해의 희망사항을 하나씩 떠올려본다. 가족의 건강과 평안, 직장생활의 무사, 아이들의 결혼 따위에 생각이 미친다. 언제나 빤한 소망인데, 무엇보다 올해는 과년한 아이의 혼사가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사실 새해 아침에 소망을 빈다고 해서 그게 이루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합리주의자의 눈에는 이처럼 자연물에 기도하는 행위가 어리석어 보일지 모른다. 신앙을 갖는 것도 부질없는 일로 여기지 않을까 싶다.
독일의 철학자 포이어바흐(Feuerbach)나 니체(Nietzsche) 같은 이는 신의 존재를 부정했다.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창조한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렇지만 세상을 꼭 그렇게 보는 것이 현명할까? 나도 한 때 그런 시각을 가진 때가 있었으나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나는 프랑스 철학자 파스칼(Pascal)의 견해를 지지하는 편이다.
신앙을 인간의 삶의 가장 높은 질서로 파악한 그는 전능한 신의 존재 여부는 인간의 지혜로서 알 수 없는 문제라고 못 박았다.
그리고 신이 없다고 믿는 것보다 있다고 믿는 것이 훨씬 인간에게 행복하다고 말했다. 결국 해답은 내 마음가짐에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내가 어떻게 마음먹느냐에 따라 세상이 달리 보이는 것이다.
내가 절실하게 소망하고 이루어지리라고 기대하면 우선 내 마음이 편하다. 설사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기대와 희망을 품는 그 자체가 행복이 아닌가!
와!
갑자기 사람들의 탄성이 터진다.
태양이 구름 너머로 반짝 이마를 드러낸다. 다들 휴대전화로 사진 찍기에 바쁘다. 불덩이가 점차 커진다. 바람 빠진 축구공이 부풀어 오르듯, 머금었던 꽃봉오리가 터지듯 떠오르는 해의 모양새가 시시각각 달라진다. 마침내 수박덩이 같은 해가 두둥실 구름 위로 솟으며 보석처럼 빛을 발한다.
대박이다! 올해 해돋이는 정말 환상이다. 오랜만에 일출을 제대로 봤다는 희열감! 휴대전화 일출사진을 아내와 아이들에게 전송했다.
일기예보 핑계를 대며 산에 따라오지 않은 아내가 부러워하겠지. 춥지만 해맑은 새해 첫날, 올해 모든 일들이 만사형통하기를! 떠오르는 태양처럼 찬란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