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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모자라는 듯한 인생

조금 모자라는 듯한 인생

by 운영자 2015.01.08

가끔 이해할 수 없는 외식이 나를 당황하게 한다. 밥그릇에 관한 문제다. 우리 가족은 분명 셋이다.그런데 음식점에 들어가 아내가 음식을 시킬 때에 보면 2인분이다. 한 사람분은 나고, 나머지 한 사람분은 아내와 딸아이다.

남기더라도 각자 1인분씩 시켜 먹자는 것이 내 주장이다. 밥이란 게 뭔가? 목숨이다. 앞앞이 목숨을 받아 세상에 나왔듯이 밥도 앞앞이 제몫을 받아야 옳다. 집에서 중국음식을 배달시켜 먹을 때도 그렇다. 딱 2인분이다.

짜장면이든 우동이든 나 하나, 그리고 아내와 딸아이 그렇게 둘이다. 받아든 음식을 아내와 딸아이는 또 다른 빈 그릇에다 으레 반씩 반씩 나누어 먹는다.

왜 한 사람 몫씩 만들어진 음식을 부족하게 나누느냐고 말하지만 역시 내 생각과 다르다. 반반씩 나누어 먹는 것이 좋다는 거다.

지난 번, 일이 있어 동햇가 사천에 갔을 때다. 거기 오징어 물회가 좋다는 정보를 먼저 찾은 건 딸아이였다.

딸아이는 스마트폰에서 그걸 찾아냈다. 서울서 세 시간 반 거리. 우리도 과거에 감탄했지만 남들도 감탄했다는 물회를 먹기 위해 음식점 앞에서 한 시간을 더 기다렸다.

그러고 간신히 자리를 얻어 음식점 안에 들어갔을 때다.이번에도 아내는 2인분을 주문하며 빈 그릇 하나를 더 요구했다. 나는 허탈했다.

오래 기다린 노고를 생각해서도 3인분을 시켜야 마땅했다. 더구나 그걸 먹자고 점심 시간을 한 시간이나 비켜 있었다. 그러나 아내는 조금 부족한 게 더 좋다며 한사코 고개를 저었다.

그 오랜 뒤 오늘이다. 문학월간지 <유심>에서 황금찬 시인의 근작시를 읽었다. “솔밭 모래에 앉아서/커피 한 잔을/둘이서 마셨지./모자라지/한 잔 더 할까.” ‘커피잔의 구름’이라는 시의 앞 부분이다.

나이 구십을 오래 전에 넘긴 노시인의 이 시를 나는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인생이란 나누어 마신 커피 한 잔처럼 조금 모자란 듯 해야 그리운 거다.

내 몫의 커피 한 잔을 나 혼자 다 마시고난 인생이 아니라 나의 노력으로 얻은 커피를 그 누구와 나누어 마시다보면 조금 모자란 듯한 결핍이 있게 마련이다.

조금 비워두는 그 아쉬움. 그것이 인생의 목마름이거나 향수이거나 그리움이라고 시가 내게 말하는 듯했다. 시를 읽고난 후에야 나는 대충 알 것 같았다.

외식을 할 때마다 아내가 왜 딸아이와 반 그릇씩 밥을 나누어 먹는지를. 예전, 식구가 많을 때는 밥이 적어 식구수대로 밥그릇에 밥을 뜨지 못하고 큰 양푼에 담은 밥을 함께 나누어 먹었다.

적은 밥인데도 밥을 다 먹고나면 늘 밥이 조금 남았다. 서로를 위해 그 밥을 남기고 수저를 놓을 때의 그 약간의 허전함. 아내는 그것을 딸아이와 함께 공유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인생엔 결핍에서 오는 그리움이 있다. 딸아이가 결혼을 하여 멀리 떠나간다면 그 모자라는 듯 했던 식욕의 결핍을 가끔 느낄지도 모르겠다.

그 결핍속에 제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사랑이, 향수가 간절히 살아나겠지. 나의 몫이라며 내 인생의 술잔을 나 혼자 다 마셔버리는 못난 나의 생각일랑 이제는 버려야겠다. 그 누구와 함께 나누어 마시느라 조금 부족해지는 결핍을 사랑하고 싶다.

“모자라지? 한 잔 더 할까?”
그러나 한 잔 더하지 않기를 바라는 결핍의 미학.

나이는 나보다 썩 아래지만 살아볼수록 아내의 생각은 남자인 나보다 늘 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