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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빠진 밥그릇

이 빠진 밥그릇

by 운영자 2015.02.05

고향 집에 개가 있었다. 날이 새면 마당을 한 바퀴 돌고, 동네 우물터를 한 바퀴 돌고, 다른 집 개들과 어울려 들판을 뛰어다녔다. 그러다가도 때가 되면 겅정겅정 집으로 돌아왔다.

그야말로 우리 집의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자유로운 영혼도 제일 먼저 가는 곳이 있다. 마당 안 수돗가다. 거기 제 밥이 있다.

삼시 세끼 식사가 끝나면 어머니는 남은 밥을 말아 수돗가 개 밥그릇에 담아 주셨다. 개가 받아먹는 밥그릇이란, 설거지에 서투른 누나가 재깍 깬 이 빠진 밥그릇이다.
농가의 밥그릇은 깨어졌다고 그냥 버려지지 않는다. 그에게는 기다리는 임무가 있다. 때로는 개밥그릇이 되는 일이다. 개밥그릇은 넓은 세상을 싸질러 다니다가 돌아온 자유로운 영혼의 뱃구레를 채운다.

말끔히 한 끼 밥을 뚝딱 먹고 나면 양이 차든 안 차든 개는 만족이다. 이렇게 해서 개밥그릇의 소임은 끝나고 마는가? 아니다.
밥그릇 앞에 넙죽 엎드린 개의 놀잇감이 되어줄 일이 남았다.

개는 앞발로 제 밥그릇을 데굴데굴 굴린다. 뒤집어엎는다. 뒤집어엎은 그릇을 주둥이로 일으켜 세운다.

밥그릇에 코를 박아 들어 올리기도 하고, 휙 날려 흙 마당에 툭 떨어지게도 한다. 마치 연인처럼 두 발로 끌어당겨 제 품에 껴안기도 하고, 목덜미 밑에 떡 베고 누워 허공에 발길질하기도 한다. 두 자유로운 영혼처럼 어울려 하나가 되듯 논다.

그렇다고 둘 사이가 매양 행복할 수만은 없다. 개는 어디서 체면을 깎이고 들어오면 물어뜯을 듯이 이빨로 밥그릇을 짓깨물며 분풀이를 한다.

걷어차기도 하고, 밥그릇을 딜딜딜딜 굴려 혼쭐을 빼어놓는다. 그렇게 험하게 굴리다가 아차, 하여 수돗가 시멘트 모서리에 탈싹 부딪히는 날이면 밥그릇은 절명한다.

“이누머 개 좀 보게. 제 밥그릇을 깨어먹었네!”
놀란 어머니는 더는 군말 없이 깨어진 그릇을 주워 집 앞 감나무 그루터기에 쨍강, 던지고 손을 터신다. 이로써 밥그릇은 이제 그릇의 소임을 다 했다. 깨어진 조각들은 거기에서 비에 씻기고, 바람에 닦이고, 백설과 찬 서리에 금이 가면서 사람의 집에 아기가 태어나고, 그 아기가 커서 글을 읽고 쓸 때를 기다린다.

먼 훗날, 그 아기가 마당에 걸어 나와 표현하고자 하는 도구를 찾을 때, 그때 그 아기의 눈에 띄는 것이 있다. 그게 바로 감나무 그루터기 밑에 오래도록 버려진, 조각조각 깨어진 개밥그릇의 잔해, 사금파리다.

아기는 사금파리 하나를 주워들고 마당에 글씨를 쓴다. 이로써 밥그릇은 다시 사금파리 연필이 되는 것이다.

흙으로 빚어진 밥그릇은 고온의 열에서 태어난다. 그 뜨거운 인내 끝에 숭고한 밥그릇이 되었고, 마침내 절명한 연후 다시 한 아이의 글씨를 익히는 사금파리 연필이 되었다가, 몇 백 년을 또는 그 후 몇 천 년을 풍화와 침식 끝에 다시 그 옛날의 흙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다시 그릇으로 태어나길 기다리는 아름답고도 오랜 잠.

베란다 제라늄 화분의 물 받침을 만들어준 깨어진 밥그릇을 바라본다. 그의 일대기가 가히 엄숙하면서도 영원이라는 시간대에 가 닿아있다.